제주와 군

제주와 피난민

똥맹돌이 2015. 6. 13. 08:57

제주와 피난민

 

피난민촌

흥남철수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가 당면한 큰 문제중의 하나는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과 함께 피난민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었다. 정부는 남침직후 6월 25일 가장 먼저 질서유지와 민심동요의 예방차원에서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하달하였고, 내무장관이 06:30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과 치안명령 제26호를 하달하여 경비를 강화케 하였다. 또한 정부는 생필품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품귀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경제적인 혼란을 예방하고자 28일 긴급명령 제2호인 ‘금융기관 예금 등 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하달하였다. 다음으로 고려된 조치는 피난민에 대한 긴급 대책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전쟁으로 인한 피난 비상계획이나 철수 계획을 수립한 적이 없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점차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하여 그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데 분주하였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1시 피난민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개최된 비상국무회의에서 이범석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울시민 철수를 질서있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나, 참석자의 대부분이 “안일하고 낙관적”이었다. 결국 이 심야 회의에서는 수원 천도만을 결정하고 시민철수문제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거의 같은 시각인 새벽 2시경 이미 대통령도 대구를 향해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정부는 서울 실함 이후에도 체계적인 피난민 철수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상황변화에 따른 임기응변에 전력하고 있었다. 먼저 동년 7월 8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7월 9일 군사작전에 수반되는 피난민 관계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민사부를 설치하였으나 전장의 이동속도가 급변하여 효과적으로 피난민을 통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전쟁과 함께 제주도로 밀어닥친 피난민들의 행렬은 유사 이래 본토사람들이 가장 많이 유입되면서 제주도민들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수 만명의 4·3사건 이재민과 본토에서 온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피난민은 북한군이 호남지방을 장악하고 경남 서부에 침투하고 있던 1950년 7월 16일부터 제주, 한림, 성산, 화순항을 통해 군용LST와 여객선편으로 1만 여명의 피난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황이 더욱 악화되어 피난민 대열이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낙동강방어선까지 이르게 되자 국회에서는 8월 1일부로 ‘피난민 수용에 관한 임시조치 법안’을 통과하여 시행하였다. 정부는 내무부와의 협조를 거쳐 각 시도에 긴급히 임시조치 법안을 시달하여 피난민의 수용대책을 마련케 하는 한편 일정지역으로의 집중 이동을 견제하고 각 지방으로 분산 남하를 지도하였다. 이에 긴급조치로 제주도에도 24개의 수용소가 긴급히 마련되었다. 특히 제주도에 피난민이 많이 건너간 것은 1월 중순 이후부터였다. 1월 13일 제주도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허정 사회부장관은 피난민 이송계획을 발표하여 “현재 제주도에는 4만 8천여 명의 피난민이 있으나 모두 각 가정에 수용돼 있다. 원주민이 적고 공지가 넓어 65만 명 정도는 더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는 우선 5만 명을 수용하기 위해 2억 원을 들여 전도 12개 면에 각각 1개소의 수용소를 지을 예정이다. 1개 수용소에 100채의 집을 짓고 1채에 50명씩 수용하며 충분한 구호를 해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후 실제 수용시설과 구호가 제대로 안되어 강제이송이란 부작용만 남았을 뿐이었다.

제주도 강제소개 문제가 불거지자 51년 1월 20일 국회에서 박승하 의원은 “어제 밤에 부산시내에 있는 전 피난민을 총칼로 위협하여 한자리에 모으고 오늘 아침 배편으로 싣고 갔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런 사전예고 없이 사후대책도 알려줌이 없이 강제로 피난민을 다른 지역으로 소개시키고 그나마 조금씩이나마 갖고 있던 식량, 의류 등을 버린 채 끌려가다시피 강제 소개 당함으로써 그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 불만이 대단하다. 그 진상를 밝히고 묻기 위해 관계국무위원을 출석시키자”고 제의하고, 계속하여 그는 “어제 저녁 경찰이 부산 대교로에 서 있던 피난민을 갑자기 트럭에 태워 다른 곳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동 피난민 중 어떤 이는 가족에게 미처 연락도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트럭에 탔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최창순 사회부차관은 “51년 1월 19일 현재 부산에는 약 35만 명의 피난민이 집결돼 있습니다. 미8군에서 계엄사령부에 통지가 오기를 1주일 이내에 급속하게 적당한 장소에 이송시키라는 것입니다. 피난민을 집결시키는 것은 내무부와 국방부에서 맡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끌고 나왔다는 것은 사회부로서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사회부는 제주도에 50만 명 거제도에 10만 명 그 외 지역에 적당히 분산시키는데 수송만 책임지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여 강제 소개는 미제8군으로부터 작전상 이유를 들어 대구, 부산 지구에 집결되어 있는 피난민을 다른 지역으로 소개시켜 달라는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너무 갑작스런 조치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2월 초까지 2만 9천여명의 부산 피난민이 거제와 제주(6회 20,975명)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 50만 명을 이송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차질이 생겼다. 국방부와 미제8군이 신병훈련을 포함한 작전상의 이유로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보내는 것은 무리라고 하여 사회부(중앙난민구호대책위)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 피난계획은 무산되고 최초 10만 명 정도 계획했던 인원 가운데 5만여 명을 거제도로 보내도록 결정되었다. 1951년 1·4 후퇴 직후 이북 5도 출신 피난민 수 만명을 포함하여 많은 피난민의 유입으로 제주도에 갑자기 7만 9,000여명의 인구가 불어났다. 1.4후퇴 시기 1951년 11월말 현재 제주도로 피난 온 38선 이북 피난민 분포상황을 보면 총 3,933명중 황해출신 575명 평북1,055명 평남1,355명 함북199명, 함남 575명, 경기 강원 174명으로 1.4후퇴 시기동안 북한 민간인이 대규모로 월남하게 된 동기는 기본적으로 북한 공산치하에서 탈출하려는 것이 가장 컸으며, 다음으로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유엔공군의 폭격과 공습을 피해 월남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쟁고아의 공수와 함께 1월 중순에는 인구가 8만 7,000명으로 늘어나고 6·25전쟁 10개월 후인 1951년 5월 20일에는 148,794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제주도 토박이 인구가 24만 명쯤 되었으니 피난민 숫자는 토착인구의 60%에 맞먹는 것이었다. 1951년 2월 현재 피난민 수는 96,570명이었으며 24개의 수용소에 28,767명이 수용되었고, 1952년 12월 31일 현재 피난민현황을 보면 이북 피난민이 6,998명(남 3,694명, 여 3,804명)을 포함하여 총 20,815명(남 10,073명, 여 10,742명)의 피난민에 66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제주도의 피난 과정에는 일부 불미스런 일도 발생하고 있었다. 초기 제주도에 피난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부의 고위관리나 부유층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예로 국방부차관의 가족과 일가친척은 1백 15명이나 되었으며, 이들 일가는 당시 부산.여수간 정기운항선인 창경환(80톤)을 대절하여 1월 4일 아침 제주도로 출항했다. 당시 송도와 다대포 앞 바다에는 밀항 대절배가 2백여 척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일시적 인구 증가로 인해 제일먼저 봉착한 난제는 식량난 해결이었다. 이들의 생계는 정부의 구호양곡이나 원조물자에 의존해야만 했다. 공공시설과 민가에 분산 수용되었지만 이들 피난민 수용시설들은 여기저기 천막집단촌을 이루는 등 허술했으며 더구나 여러 가지 질병의 만연하면서 의료시설마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속수무책이었다. 1950년 8월 대구에서 열린 지방장관회의에 참석한 김충희지사가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구호양곡을 내려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구호대책을 서둘기 시작했다. 1951년 5월까지 제주도에는 피난민에 대한 구호물자로 양곡 4천52톤, 담요 1만5백매, 침대 2천개, 이불 2천장, 소금 2백톤, 천막 350장, 아동용급식품 2천88상자가 공급되었다.

제주읍 동문시장을 중심으로 관덕로와 칠성로 일대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제주도민들이 뒤섞여 살았는데 그나마 제주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던 번화가였다. 동문시장은 읍내 중심지에 위치하여 제주의 관문인 제주항과 직결되는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동부지역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산지천 주변에 입도한 피난민들이 많이 살았는데 바로 이들의 생활터가 동문시장 부근이었다. 그리고 당시 관덕로 주변에는 관공서와 상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었고, 시내 대규모 행사는 대부분 관덕정 광장에서 행해졌다. 관덕정에서 중앙로 쪽으로 나있던 관덕로는 도로와 광장, 그리고 장터의 역할을 모두 소화해 낼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 대로를 조금 비켜서면 구불구불 골목이 이어진다. 일제 때 상가로 시작된 칠성통은 의류, 포목점, 귀금속, 시계류 판매점, 양화점 등 제주의 상권 중심가,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6.25전쟁 직후 ‘산지골목’의 협동상회는 유명한 포목상이었고, 순창옥, 동일식당, 칠성당 빵집 등 먹거리 집도 잘 알려진 곳이다. 50년대 초반 최초의 다방 ‘파리원’이 생겼고, 동백, 남궁, 호수, 산호, 청탑다방 등으로 이어졌다. 모슬포에도 많은 피난민이 유입되어 민가에는 빈방이 없을 정도였다. 거리는 군인과 피난민들로 인해 늘 북적되어 혼잡하였다. 피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사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하모리 고개동산 동북쪽에 자연발생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두 번의 이동을 거치면서 5일장이 공식적으로 형성되었다.

1951년 들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귀향 또는 수복지구로 떠나는 피난민이 많아 1952년 초에는 피난민 숫자가 28,000여명으로 줄어든다. 이들 피난민과 제주도민 사이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음은 물론이다. 피난학생과 본도 학생들의 집단 패싸움이 동문 로터리에서 벌어져 교통이 차단되고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남한출신 피난민들은 1951년 늦은 봄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으로 교착돼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53년 3월에 구호대상자가 42,000명이었으며, 좀도둑도 기승을 부렸다. 3월 23일에는 한경면에서 ‘살모매장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중고교 입학시기에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도 늘어나는 등 사회불안 요소가 만연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주사회는 피난민들의 최종 종착지로써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인사들이 유입되고, 제1훈련소 등이 설치되면서 교육, 문화예술, 체육,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리고 국제대학의 전신인 한국대학이 1951년 봄에 제주도 분교를 설치하여 문리학부와 법정학부를 두어 현 제주향교와 제주남초등학교를 임시교사로 활용하여 야간 수업을 실시하였고, 한국대학이 서울로 이전하게 되면서 1951년 9월부터는 제주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면서 1952년 5월에 2년제 제주도립초급대학 설립이 인가되었다.

 

(1) 주택난과 구호활동

제주도 동부지구의 피난민은 2만 명이나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경가족과 일반 피난민들인데 주택난으로 대부분 천막과 바락건물에 수용되어있었다. 매일 식량을 보급 받고는 있으나 물가고와 식수난, 주택난으로 도리어 본토로 귀환을 희망하기도 했다. 당시 전도의 주택은 4만 2천동인데 인구수가 20만 명으로 5만7천세대가 잠자리를 구하려 허덕이고 있었다. 이마저 집이라고 이름만 붙은 것이며 3칸1동에 1백5십만원 내지 2백만원이고 셋방을 구할 수 없어 당국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2만원 자금으로 가수용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1951년 3월 친목단체로 제주도피난협회를 구성, 구호품 배정업무와 상부상조를 위한 정보교환을 시작했으며, 도 당국도 4월 27일 동란 구재민 구호위원회를 조직했다.

원조도 이어졌다. 1950년 7월부터 1951년 6월까지 1년간 본도의 피난민에게 지급된 구호양곡은 4,052톤에 이르러 연 10,605명이 구호혜택을 받았다. 또 UN구호물자로 모포 1만5백장, 침대 2천개, 이불 3천장, 소금 2백 톤, 재킷 2만5천개, 천막 3천5백5십동, 아동용 급식품 2,883상자가 배급됐다. 또 피난민 보건증진을 위해 본도에 구호병원 4개소, 진료소 30개소가 세워져 16개 반 64명의 의료진(의사 16, 조수 32, 간호원 16)이 파견되었다. 1년간 취급 환자 수는 연인원 173,695명이 되었고, 장티푸스 등 전염병 환자 1,457명이 생겨 71명이 사망했다. 서울대학병원 주력부대는 부산 육군병원을 거쳐 한림지역에서 6개월 정도 의료지원을 실시했다. 이들은 한림면 사무소의 창고를 빌려 제2국민병을 진료하는 구호병원(원장 윤태권, 간호과장 김정순)을 개설하고 있으면서 지역주민과 피난민 환자를 동시에 돌보기도 했다. 전황의 변화에 따라 한림 구호병원은 1951년 7월 문을 닫았다.

아울러 정부는 피난민과 제주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주도청에 산업국을 신설하고 산업진흥을 독려하는 한편 경제작물을 재배 육성토록 하고, 경인지역의 대기업인 조선피혁, 조일고무 등 일부 기업을 제주로 이동케 해 가동시킴으로써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제주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도내 전력과 원료의 공급난으로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휴업상태에 있다가 휴전 후 본토로 이설됐다. 1951년 늦은 봄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으로 교착돼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남한출신 피난민들은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한출신 피난민들이 대부분 떠나간 후인 1952년 8월 21일 이북출신들로 북한 피난민 제주도연맹을 결성하고 이사장에 임면호를 선출했다. 피난민들은 출신도별로 친목단체인 도민회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52년 3월 황해도민회, 5월에 평안도민회, 9월에는 함경도민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제주도 피난민 현황을 보면 1951년 3월 31일에 71,228명, 1951년 5월 31일에 148,794명, 1952년 12월 31일 20,815명, 1953년 4월 30일에 20,359명이었다.

한편, 1950년 12월부터 피난민이 증가하고 무장대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군은 1951년 1월 14일 무장대 토벌 목적으로 1개 중대의 해병대를 제주도로 파견한다. 당시 한라산의 무장대는 약 80명으로 추산되었다.

(3) 피난민과 도민의 갈등

4.3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제주도는 당시 도민 중 절반이 넘는 9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데다 생업수단을 잃고 기아선상에 놓여있어 밀려든 피난민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육지부 피난민과 제주의 이재민을 구호할 식량 공급책도 전무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민들은 학교와 공회당 등 공공시설과 간이천막에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민가에까지 분산해 받아들이는 등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대했으나 흉흉해진 사회상에다 생활문화의 차이, 구호품배정 문제로 갈등과 마찰이 빚어졌다. 피난민들은 집 주인의 승낙도 없이 무조건 민가에 들어와 2~3일만 살게 해 달라고 한 후 오랫동안 머무는 경우가 많았으며, 제주도민의 생활방식을 비하하는 등 감정적인 충돌도 잦았다. 실제로 1951년 2월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다 피난을 온 김상돈은 김충희 지사에게 피난민에게는 잡곡만 주고 제주도민들에게는 미곡을 주는 등 구호품배정 과정에 협잡꾼의 농간이 있다고 불평해 도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타향에서 피난살이를 해야 할 육지 피난민과, 육지출신인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고 여기는 제주도민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상존했으며 정부의 구호품을 두고 마찰을 빚는 등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갔다.

이에 따라 피난민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구호품배정 업무와 피난민 간 상부상조, 정보교환과 제주도 당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1951년 3월 ‘제주도피란민협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정부도 피난민 구호를 위해 사회부 제주분실(책임자 최승만)을 두고 제주도와 함께 구호품배정과 피난민의 민원을 해결해 나갔고, 도 당국은 ‘동란이재민구호위원회’를 조직해 이를 후원했다. 1952년 5월 처음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에 피난민들은 대표격인 피난중학교장 김상흡을 출마시켜 초대 제주도의원으로 선출시키는 등 기반을 구축하고, 정부에 여론을 형성하여 1951년 8월 제주출신 김충희 지사를 물러나게 하고 사회부 제주분실 책임자로 파견된 최승만을 제6대 도지사로 취임케 하는 등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피난민들은 1952년 8월 21일 ‘북한피난민제주도연맹’을 결성하였다.

1953년 2월 10일 피난민들은 비 날씨 속에서도 2,000여 명이 관덕정에 모여 ‘피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차별대우를 성토하며, 구호곡의 일부를 4.3사건 이재민에게 배급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시정 조치할 것, 피난민에 대한 전세방 요금 인상은 피난민주택임시조치령을 위반하는 반정부적 처사이므로 환원 조치할 것 등 8개항을 요구했다. 피난민 김명수는 이 대회에서 피난민구호를 위해 제주에 계엄령을 실시하라고 요구하면서 도의장을 공산당이라고 공격하는 등 피난민과 제주도민 간 대립을 선동하여 제주도민을 자극했다. 1952년 제주지역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 절량농가가 속출한데다 4.3이재민에 대한 구호대책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아 그 참상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읍.면 연석회의에서 궁여지책으로 피난민 구호곡의 일부를 이재민에게 배정해 주도록 도당국에 건의하고 도가 이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것도 시비대상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 구호곡 문제는 중앙에까지 말썽이 돼 조사반이 내려왔으나 본도 원주민의 절박한 사정이 고려돼 원할히 수습된 바 있다. 이에 도민들은 4.3과 6.25전쟁, 흉년으로 도민들도 기아선상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도민의 대표에게 망발을 한 피난민세력을 공격하고 나선데 이어 도내 각 단체도 반박성명을 내는 등 험악한 상황에서 김명수가 경찰에 구속되고 피난민출신 도의원 김상흡이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선에서 극한 대립을 막고 마무리됐으나 피난민과 제주도민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였다. 1953년 3월에는 구호대상자가 42,000명으로 급증하고 좀도둑이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