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과 제주도
국민방위군과 제주도
국민방위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국민방위군설치법(1950.12.11 공포)에 의하여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약 50만 명을 51개 교육연대로 편성하여 조직하였는데, 병력수송과 훈련, 무장 등을 하는데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못하고 행정적인 조처도 미흡하였으며, 대한청년단 단원들을 뽑아 현역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지휘통솔력이 부족해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실제로 이들이 1·4후퇴 때 부산까지 걸어서 후퇴하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1,0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가. 국민방위군 사건
1950.12.21.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불과 100여일 사이에 국민방위군 50여만명 중 5만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1951년 4월 30일 방위군 설치법이 폐기되었을 때 방위군 50만 명중 272,743명이 탈영이나 행방불명, 동상, 질병, 사망으로 방위군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이었던 이병국(李炳國)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한톨, 군복 한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대신 국민방위군에게는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되었는데, 행군 도중에 책임자가 이 양곡권을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남하할 때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1951년 1월 15일 부산피난지에서 열린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정부대책을 집중적으로 추궁하자 그해 2월에 36세 이상인 장병들은 귀향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유령인원을 조작하여 거액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 2000섬의 양곡을 부정처분한 것이 드러난 이른바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부통령 이시영(李始榮)과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模)가 사임하는 등 정국이 어지러웠다. 결국 국회의 결의에 따라 1951년 5월 12일에 해체되었다.
나. 제주도 주둔과 유해발굴
제주도에서도 대한청년단을 위주로 국민방위군 향토방위대가 조직되어 자체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4·3과 6·25참전으로 국민방위군에 편성시킬 청년이 부족하자 10대 후반의 처녀들도 징발하여 훈련을 시켰으며, 1·4 후퇴 직후 열흘만에 제주에는 9만여 명의 피난민이 들어왔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국민방위군도 섞여있었다. 『동아일보』(1951. 4. 4)에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내륙지방출신 국민방위군 8,595명이 제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들은 제주도내 각처에 분산 수용되어 훈련을 받았다.
옛 중문면 강정초등학교에는 2,000여 명의 방위군이 수용생활을 했는데, 마을주민들은 이들이 무명옷을 입고 있어서 피난민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보급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은 동료들에 의해 강정천 주변(현 서귀포시 강정정수장 서북쪽 속칭 ‘난쟁이도’ 하천변. 도순동 1368번지 일대)에 가매장되었다.
경기도에서 징집되어 제주에 왔다가 이곳 강정천에 묻힌 부친의 소식을 전해들은 유가족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2003.5.19. 오후 2시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해군 제주방어사령부(사령관 김일수 준장)는 가매장된 채 잊혔던 무명용사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하여 국방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 실무자와 지역 재향군인회·무공수훈자회·전몰군경유족회·상이군경회·해병대전우회·6.25참전전우회 관계자,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토제(開土祭)를 갖고 무명용사 유해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2003.6.12. 무명용사 유해 44구를 발굴하였다.
해군 제주방어사령부는 2003.6.13. 서귀포시 소재 해병 제6613부대에서 국민방위군 유해 44구를 모시고 장병, 유족 등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무명용사들의 유해합동영결식을 거행하여 영령들의 넋을 기렸으며, 이들 유해는 제주시 양지공원에서 화장된 후 서울로 봉송,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키로 하였다.
김일수 사령관은 조사를 통해 “영령들의 그 크신 뜻으로 지켜낸 이 나라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임들께서 몸으로 실천하신 ‘위국헌신’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 증언, 한라일보, 6.25전쟁관련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