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제주예청

똥맹돌이 2013. 8. 28. 15:08

제주예청

조선시대 제주섬을 지키던 여성군인을 제주방언으로 예청(女丁)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조선시대 내내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섬사람들이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왜구에 대한 방어대책을 세웠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3읍성을 축조하는 한편 그리고 해안요충지에 9진(鎭)을 설치했다. 횃불과 연기로 긴급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25봉수(烽燧) 38개의 연대(煙臺)를 만들었다. 그러나 방어시설과 관군만으로는 왜구를 방어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제주의 남성들은 생업과 공물을 진상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제주여성들도 섬을 지키는 군인이 되었다. ‘제주여청’은 적의 직접적인 공격목표가 되는 ‘화살받이터’(제주예청을 기록한 최초의 문헌인『남사록(南錄)』(1601년)에는“성을 지키기 위해 민간에서 건강하고 씩씩한 부녀자를 뽑아 화살받이터에 보내 세웠다.”고 하였다)에서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제주여성들은 1901년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주성문을 열어줘 민란군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기도 했다.

 

이같이 왜구의 침입이나 민란 등을 위기상황을 대처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지역공동체의 동반자로서 제주여성들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제주예청’의 호국정신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지원한 제주여성해병(1950년 8월31일 제주시 북초등학교에서는 대한민국 초대 해병대 사령관의 극구만류에도 불구하고 126명의 여학생과 여교사가 구국의 일념으로 입대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최초의 여자해병대원으로서 남자들과 40일간의 동일한 훈련을 마치고 현역생활후 제대하는 제주예청의 후예로서 명예를 간직하게 된다.

)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한국 여군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