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제주산업
제주의 산업
6.25전쟁기간 내내 해마다 흉작과 재해가 겹쳐 식량이 떨어지는 농가가 속출했다. 피난민 입도와 4.3사건으로 인한 이재민 등 정착과 혼란이 엇갈렸다.
1950년대 제주도의 산업은 거의 농업에 의존하였고, 그나마 영농구조 자체가 식량자급을 위한 잡곡생산 위주의 영세농업이 대부분이었다. 3월이면 보릿고개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1951년 초가을 태풍이 본도을 휩쓸고 지나가자 추곡생산량이 계획량이 50%선으로 뚝 떨어졌다. 1952년의 보릿고개는 너무도 빨리 찾아와 2월초 우도 등 도서지방에서 비롯된 절량사태가 3월이 되자 전도에 파급되었고, 특히 조천, 구좌, 한림 등 북군관내 지방이 심했다. 1952년 흉년에는 절박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도 당국이 곡식을 원료로 한 주류제조와 음식점에서 쌀밥 파는 일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리고 환마양곡제를 실시했다. 조랑말의 육지반출을 허가해주는 대신 교환조건으로 식량를 사들여 오도록 했던 것이다. 잡곡의 도외반출이 전면 금지된 가운데 심한 가뭄과 8월17일의 태풍으로 추곡작황도 나빠 도는 추곡감수율을 벼 60%, 조 60%, 고구마 58%라고 발표했다. 당시 피해액은 140여 억원이었다.
1953년 절량사태는 굶어 죽는 이와 문전 걸식인들을 급증하게 했다. 전분 찌꺼기로 목숨을 잇고 파래, 톳 같은 해초와 좁쌀로 죽을 끓여 주린 배를 채우는 집이 많았다. 한꺼번에 들어 온 피난민들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도 없지 않았다.
피난민 구호양곡을 이들 굶주린 원주민과 4.3이재민들에게 나눠주자, 1953년2월10일 관덕정 광장에 2,000명쯤 모인 피난민들은 “행정기관이 차별 대우를 한다. 우리를 육지로 실어다 주거나 계엄령을 다시 선포하라.”고 성토하였다. 곧 원주민들과의 충돌이 일어나자 도지사가 유감 성명을 내고 도의회가 긴급 소집되었으며 도내 단체들이 반박 성명을 내는 등 구호양곡 문제는 살벌한 감정대립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해 3월에는 구호대상자가 4만2,000명으로 늘어났고 마을마다 ‘입맥선매’현상이 일어났다. 좀도둑이 많아지고 3월23일 한경면 어느 마을에서는 구걸하는 노모를 차마 보지 못하여 죽이는 ‘살모매장사건’까지 일어났다. 중고교 입학시기에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제주읍 동문상설시장에 큰 불이 났다. 1953년 3월 13일 하오 5시45분 쯤 발생한 화재는 한 상인이 라이터에 휘발류를 넣으려다 인회된 것이었다. 순식간에 시장을 모두 태우고 저녁8시경에는 북서쪽 산지천 하류에 있는 건물과 남쪽으로 일주도로를 건너 주택까지 번졌다. 의용소방대와 모슬포의 군소방대가 동원된 가운데 발화 3시간 만에 진화되었다. 이날 화재로 연사 2명, 중화상 13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112채 손실 등 1억7,000만원의 재산피해를 내었고, 제주북초등학교 등에 이재민을 분산 수용하고 침구와 양곡을 지급하였다. 당시 동문시장은 제주도 전체 생필품을 공급하는 중심 교역의 장소였기 때문에 화재의 여파는 상당히 컸다. KCAC(한국민사원조처 사령부)에서는 구호곡 2,000톤을 보내왔고, 모슬포 제1훈련소에서도 천막30량을 지원하였다. 한편 긴급 소집된 제주읍의회는 특별대책위원회를 설치했고, 읍 당국은 시장재건비 1,700만원을 계산한 새 예산안을 편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