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포로와 제주
중공군 포로와 제주
중공군이 6.25전쟁에 전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선에서는 북한군포로와 함께 중공군포로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들 포로들은 처음에 부산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반격작전과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의 변동이 심해져 포로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최대 166,000여 명까지 이르게 된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포화상태에 있는 수용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제도에 대규모의 포로수용소를 설치‧관리하였다. 그런데 거제도에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에는 학살과 잔학행위가 수시로 발생하였고, 심지어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6월부터 포로들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분리하여 분산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북한군 포로는 육지에, 송환거부 중공인 포로들은 제주도 모슬포에 새로이 설립된 제13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중공군 포로 중 본국 송환 희망 포로들은 7월에 제주읍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포로수용소로 이동되었다. 1952년 8월말 현재 모슬포 산이수동에 위치한 제3수용소(POW Camp 3)에 송환을 원하지 않는 중공군 포로 1만 4,000명이, 그리고 제주읍비행장에 있는 제3수용소 분소(POW Branch Camp 3a)에 송환 희망 중공군 5,887명이 분리, 수용된다. 1953년 2월 1일에 제주에 수용된 포로인원은 모슬포에 14,314명, 제주읍 제주비행장에 5,809명이었다.
그런데 제주읍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용된 친공 중공군 포로들의 시위와 자살하는 일이 빈번했다. 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공정권수립 3주년을 맞아 행사를 가진 후 시위에 나섰고, 이에 포로수용소를 경비 중이던 미군 2개 소대가 출동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UN군 사령부 헬렌소장은 “폭동은 집단 탈주공작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탈주후에는 한라산 공비들과 합류할 계획까지 세운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이후 미군에 대한 포로들의 감정이 극도로 나빠져 순찰중인 미군 장교를 덮쳐 집단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포로수용소 주위에 있던 어영부락, 사수동, 다호동, 도두동 주민들은 이들이 철수하는 날까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또한 모슬포에 수용된 반공포로들은 모슬포 공항에 격리 수용되어 비행장 입구에서 사계리 방면으로 가는 길을 확장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 포로의 수용으로 인해 모슬포 산이수동에 살던 주민들이 삶 터를 잃고 소개 생활을 해야 하는 등 포로수용소는 제주도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포로교환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장면(1953.4.11)
한편, 정전협정이 이뤄졌으나 포로 중에는 북한과 중공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가 있어 이들을 자유의사에 맡길 것이냐 그들의 본국으로 다 돌려보낼 것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쌍방의 합의가 난항을 거듭하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현병사령관 원용덕을 시켜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 포로 중 송환을 희망하는 중공군 포로 5,640명을 배와 육로를 통해 비무장지대에 설치된 포로 송환장소로 이동시켜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공산 측에 송환하였다. 이들 포로들은 송환과정에서도 난동을 부려 호송하는 군인들이 적잖은 곤욕을 치렀다. UN측은 포로 수송항을 모슬포항으로 택하고 이송시간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새벽으로 정했지만, 포로들은 모슬포로 향하는 트럭위에서 괴성을 지르고 웃옷을 벗어던지며 감정을 발산했다. 이들의 해상 이동에는 포로의 안전과 경비를 위해 각 배마다 2명의 장교와 60명의 병력이 동승하였다. 이들의 승선 및 해로 수송 작전은 큰 사건없이 진행되었다. 그래도 상당한 양의 포로용 피복과 장비가 포로들에 의해 손상을 입거나 파괴되었다. 한편, 인천에 도착한 포로들은 육로로 수송되었다. 포로의 육로 수송은 인천과 영등포 간의 철도, 그리고 인천과 문산 또는 영등포와 문산간의 도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도로상의 이동이든 철도상의 이동이든 간에 우발적인 사건에 대비한 추가적인 안전 조치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친공포로 뿐만 아니라 포로송환 그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한국 국민들이 포로 수송 열차나 차량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포로들은 대개 영등포 수용소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기차로 자유의 다리까지 이동하였다. 거기서부터 최종적인 이동은 트럭으로 이루어졌다. 이곳 영등포 임시 수용소에서는 매일 2,400명이라는 일정한 인원이 교환장소로 수송되었다. 휴전 후 친공 중공군 포로 5,640명이 공산측에 송환되었다.
병상포로교환장면
그리고 포로 중에서 전쟁이 끝나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힌 사람들, 즉 송환거부 포로들은 1953년 6월 8일 조인된 ‘포로협정(중립국 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과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협정에 대한 임시적 보충협정’에 의거,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협정들에 따라서 인도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고 유엔군측의 스위스, 스웨덴과 공산군측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 대표를 위원으로 하여 송환거부 포로의 처리업무를 수행할 ‘중립국송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9월에 들어서자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각각 송환거부 포로들의 수용 시설과 설득 장소의 설치, 포로의 이송 업무에 착수하였다. 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유엔군측은 비무장지대의 남단에 본부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폐허가 된 문산의 사과과수원에 약 80동의 천막을 가설했는데 각 천막의 마루와 벽은 판자로 막고, 타원형의 난방용 석유난로를 설치하였다. 당시의 문산은 중공인, 한국인 미국인 및 전세계에서 몰려든 보도진으로 하나의 국제 도시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유엔군측은 공산측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 22,604명(중공인 14,704명, 북한인 7,900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9월 초부터 이들을 중립 지대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9월 8일, 첫 번째 송환거부 포로들이 LST편으로 제주도를 떠나 인천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 해로 수송에는 대규모 LST선단이 동원되었다. 인천에서 문산까지는 기차편으로 이송되었는데, 이곳에는 포로들이 인도군에 인계될 때까지 잠시 머물게 되는 임시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립국송환위원회는 9월 9일에 첫 회합을 가졌으며, 유엔군측은 다음날부터 송환거부 포로들은 인도 관리군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송환거부 포로의 수송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유엔군측은 9월 23일까지 총22,604명을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인도 관리군에게 인계하였다.
제주도에서 수용된 중공군 반공포로들이 자체 내에서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85명의 공산첩자 용의자 명단을 유엔군측에 제공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분리 수용하였으며 중립지역에서도 인도군은 이들을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들이 공산측으로 송환되던 날, 그 중 21명이 본국 송한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표명하였다.
대만으로 가려고 하는 반공포로들을 수송하기 위해서 15척의 LST가 투입되었다. 이들을 호송하기 위해서 4척의 구축함이 동원되었고, 경비를 위해서는 미 제3해병사단 제4해병연대의 병력이 배에 탑승하였다. 먼저 10척의 LST가 54년 1월 25일에 대만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5척이 26일에 도착했다. 포로에서 새로운 민간인으로 변신한 14,000명이 그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1월 23일에는 미 공군이 6대의 비행기를 제공하여 서울로부터 타이페이로 142명의 중공인 환자를 공수했다.
1954년 2월 19일 현재 송환을 거부한 중공군 포로 처리 결과를 보면 공산군측으로 귀환이 440명, 탈출 및 행방불명 2명, 인도군의 관리 중 사망 15명, 인도로 이송 12명, 유엔군측으로 전향이 14,23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