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고아수송작전과 산업국신설(6)
6. 고아수송작전과 산업국신설
제주동국민학교 앞에 있는 제주여고 교사자리에 국방부 제2조병창이 이설된 것은 1950년 12월 16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그해 9월 10일 제주방송국이 개국되어 전파문화가 처음으로 이땅에 선보였다.
조병창을 중심으로 제주읍을 비롯한 한림, 모슬포 등 도시성격을 띤 지역의 민간인 공장들이 군수공장으로 전환하여 피복류 등 군수물자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활발한 가동을 보지는 못했다.
트르만대통령과 맥아더元師가 웨이크島에서 회담한 지 닷새 뒤인 10월 19일 적도(敵都)평양이 아군에 의해 완전 점령되고 진격을 계속한 우리 국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 국경을 향해 잔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처음으로 개입하여 인해전술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1주인 전인 10월 12일이었다.
국군 제2군단과 중공군 4만명이 운산에서 대접전을 벌였던 10월 26일, 같은 날 국군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무적의 한, 미군은 한.만국경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고 11월 24일 맥아더元師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공군 대부대는 청천강유역에서 미군을 강습했다.
아무리 현대장비를 갖춘 막강한 유엔군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는 견뎌내지 못했다.
조국통일이 눈앞에 다가서는가 했던 국민의 부푼 기대는 물밀듯이 쳐내려오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2월 2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함을 고비로 전선은 또다시 교착상태로 빠지고 이때부터 작전상 후퇴가 실시되었다.
피눈물을 머금은 철수작전이었다.
12월 24일 제10군단이 흥남에서 철수한 뒤를 이어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후퇴한 것은 세모를 하루 앞둔 12월 30일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던 1950년 악몽의 해는 서서히 그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사이 제주의 젊은이들은 저 인천상륙작전에 핵이되었던 해병대를 비롯 제5훈련소 입대장정들이 수천명 출정하여 각 전선에 골고루 배치되어 명예와 무공을 드날렸다.
한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예측할 수 없게 악화되어 갔다.
1951년의 새해가 밝은 지 사흘만에 유엔군은 서울을 철수, 또다시 남하의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1.4후퇴였다.
6.25직후 3개월의 적 치하에서 공산당의 몸서리치는 만행을 몸소 체험했던 서울시민들은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앞을 다투어 피난길을 서둘렀다.
엄동설한 속에서 아비규환의 대열이었다.
제주도에 15만명에 육박하는 피난민이 쇄도한 것은 1.4후퇴에서 비롯된 결말이었다.
미국의 해스대령이 전쟁고아들의 공수작전을 펴기시작한 것은 서울철수가 시작된 지 나흘만인 1월 8일이었다.
미 수송기 편으로 제주비행장에 공수된 85명의 전쟁고아 제1진은 인도주의에 입각한 미군당국의 따뜻한 보호아래 낯선땅 제주에 첫 발을 디뎠다.
부모의 따뜻한 품을 떠나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벗어난 고아들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지도 모를 막막한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날 비행장에는 하얀 한복차림의 김충희지사를 비롯 전인홍 총무국장, 이종극 경찰국장 등 많은 관민이 나와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생명들을 따뜻이 맞이했다.
고아수송에 대해 김충희지사는 이미 정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었다.
그는 현지 군당국과 협의한 끝에 제주농고 운동장에 임시 수용소를 마련키로 하여 그 준비작업을 서둘고 있던 터였다.
3동의 콘세트 건물이 덩그러니 급조되었다.
고아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가슴에 품어 일일이 비행기에서 내려주는 해스대령의 따뜻한 인간애는 출영인사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해스대령을 통해 제주에 수송된 고아들은 약7백명을 헤아렸다.
고아들 중의 일부는 이미 미국으로 공수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졌다.
제1진의 고아들로 한국보육원이 신설되고 사회사업가인 황온순이 원장에 취임했다.
검은테 안경을 쓰고 동그스름한 얼굴의 황온순, 그녀는 그 이름 그대로 따뜻하고 온순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이리하여 한국보육원은 제주도 후생시설의 효시가 됐다.
37도선에서 중공군과 대치하던 유엔군은 1월 25일 총반격을 개시했고 2월 9일에는 우리 국군이 서울에 돌입하여 중공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서울에서의 항전이 계속된 지 2주일 뒤인 2월 20일 중공군은 드디어 퇴각을 시작했다.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한 것은 3월 14일이었다.
중공군이 서울에 침공한 지 70일만의 개가였다.
이에 앞서 2월 19일 제주지구는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얼마 뒤인 3월 21일에는 제1훈련소가 창설되어 초대소장에 백인엽 준장이 취임했다. 일제 말기 일본이 본토수호의 최전방으로 수많은 진지를 구축,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던 이른바「대촌병사(大村兵舍)」가 있던 모슬포-.
이곳은 이제 우리 국토를 수호하기 위한 정병(精兵)을 길러내는 군사도시로 탈바꿈했다.
이 무렵 김충희지사는 전쟁수행을 위한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행정력을 정비하여 지방자치에 따른 본연의 임무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통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식량의 자급을 위해 허덕이고 있는 농촌의 영농구조를 단계적으로나마 개선해가야 한다고 착안했다. 또한 오랜 전통이 있는 축산의 진흥을 위하여 사료의 확보문제가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진흥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
먼저 기구를 정비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무국에 예속되고 있는 산업업무를 따로 독립시켜 이 방면에 전념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과제였다.
김충희는 제주도의 특수성과 산업구조의 독자성을 설명하고 타도와 마찬가지로 산업국을 부활해야 한다고 중앙에 건의했다. 초기의 산업국은 전면파업 이후 총무국에 흡수, 통합되고 있었다. 그 타당성은 정부에서도 인정되었다.
1951년 4월 1일자로 산업국 신설이 인가되고 국장에는 농무과장이던 이홍림의 승진이 상신되었다.
기구개편이 되던 날 김지사는 이홍림을 지사실로 불러들였다.
『이제 전황도 호전되는 듯하니 행정본연의 소임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소.
무엇보다도 경제작물을 장려하여 농민들도 돈을 만질 수 있도록 장려책을 연구해 보시오.
내 생각 같아서는 제충국(除虫菊)과 같은 작물이 약제로 얼마든지 팔릴 것이므로 좋을 듯하오.』
노력과 비료가 별로 들지 않은 특용작물인 제충국(除虫菊)은 일제 때부터 장려되고 있었으나 소득이 될만한 규모는 재배되지 않고 있었다.
실로 오늘을 있게 한 산업발전의 발돋움은 이때부터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출처 : 도제50년 제주실록. 1997.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