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간 제주도 주요일지(1950.6.25~12.31)
1950년
6월25일 6.25전쟁 발발
(6월28일 서울함락)
(7월5일 유엔군 참전)
(6월25일~6월30일 국군 제6사단의 춘천전투)
(7월5일 스미스특수 임무부대의 오산전투)
6월26일 김충희 도지사 6월 27일 열릴 예정이던 지방장관회의에 참석하 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으나 전면전으로 확대된 전쟁으로 인해 제주로 귀향
7월8일 전국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는 신현준 해병대령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계엄사령부가 관덕정을 사용 하게 되면서 도청직원들은 임시 사무실 대부분을 계엄사에 내주 고 한쪽 방에서 사무를 보았다.
7월15일 해병대 1개 대대(3개 중대), 제주항을 출항하여 군산항으로 이동 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7월16일 제주도 남제주군 섯알오름 동굴에서 주민 218명 사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육군 제5훈련소가 제주주정공장 구내에 설치되어 제1교육대는 모슬포, 제2교육대는 한림, 제3교육대는 주정공장, 제5교육대는 제주농업학교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대부분 제주출신 장정들이 었고, 일부 육지에서 온 피난민도 있었다.
제주, 한림, 성산, 화순항을 통해 군용LST와 여객선편으로 1만 여명의 피난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공시설에 분산 수 용되었다.
7월18일 검사장에 원복범이 발령되었다.
(7월20일 대전함락, 7월24일 광주함락)
7월25일 재산무장대, 중문면 하원경찰지서 습격, 민가 99동을 방화하였다.
7월26일 제주도개발단이 한국은행, 상업은행, ECA(경제협조처, 미국의 대 외원조기구)직원들과 함께 제주항에 도착했다. 이는 강경옥의원 이 이승만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비전투지역인 제주도에 ECA사 업을 끌여 들어 오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년 9월28일 서 울이 수복되자 제주도 보다는 서울재건이 급선무라 하여 수포로 돌아간다.
육군 제5훈련소가 제주주정공장에 설치되었다. 그러면서 제1교 육대는 모슬포, 제2교육대는 한림, 제3교육대는 주정공장, 제5교 육대는 제주농업학교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대부분 제주출신 장정들이었고 일부 육지에서 온 피난민도 있었다.
7월27일 공군본부 작전명령(특명 40호)으로 모슬포 대정국민학교에서 공 군 제주기지부대가 창설되어 공군간부를 양성하고 공군부대 창 설의 기반이 되었다.
7월30일 청방(청년방위대) 제주도추진위원회 읍지부 결성식이 오후 1시부 터 한청(대한청년단) 삼도리회관에서 개최되어 지부장에 제주읍 장 김차봉씨를 임명하였다.
향토방위대, 대통령 긴급명령 제7호 비상향토방위령이 30일 선 포되면서 그 편성에 촉진을 가하고 있다.
거문도 경찰행정, 종전에 전라 여수 경찰관할이었다가 30일자로 제주도경찰국에 이관된다.
8월1일 제주도 유지 12명 모함사건이 발생
한림수산중학교, 3학년생 고지선군과 교사 김수림이 혈서로 출정 을 지원하는 등 129명의 지원자가 나왔다.
국민회 도위원장, 대한부인회 도회장, 한청 도단부단장, 여한청 도단부단장, 도 문교사회과장. 북제주군수 등의 공동발기로 한청 삼도리 단부사무소에서 제주도 총후보국회 결성된다. 결성 목적 은 군경과 청방 원호 추진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회장에 강 지수씨를 선출하였다.
한국은행 제주도출장소가 신설.개업되었다.
(8월1일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
8월2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다. 대장에는 김호산이 추대되어(교관 송봉규.고남화) 8월16일 출정식을 가졌다. 이들은 학도돌격부대의 명칭으로 독립부대를 유지시켜줄 것, 학생간부들 에 의한 지휘통솔, 신병훈련 후 곧 전선에 투입시켜줄 것, 통일 후 지체 없이 복학조치를 시켜줄 것을 신현준 제주지구 사령관 에게 요구하였다. 신 사령관은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 속하고 학생들의 해병대 입대가 결정되었다.
성산동초등학교 교원 4명, 지난 7월 24일 해병대 모병소집을 받 고 혈서를 쓰고 지원하였다.
(8월3일~8월30일 국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 8월3일 낙동강철교 폭파)
8월4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관 이성수, 기자와의 회견석상에서 치안 안정 을 위해 새로이 조직되는 의용경찰대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 표하였다.
8월5일 해병대 신병 입영식(해병3기)이 5일 오전 10시 모슬포부대 영정 에서 거행되었다(신병 1,661명)
신성여자중학교 학생 30여 명, 5일 6일 양일간 해병대사령부에 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오현중학교, 생도 간부를 포함 423명이 출정을 지원하여 현장에 서 혈서를 썼다.
8월6일 해병대 신병 입영식이 6일 오전 10시 제주북초등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제주농고 교장 최남식과 한림수중 교장 오승진씨가 각각 정직처 분을 받았다.
8월7일 6일 밤 10시경 전주 전선 순찰 중 강정 2구 일주도로변에서 잠 복하고 있던 무장대 수 명의 저격으로 순직한 양종국, 윤시찬, 강경생 3주의 영령에 대한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8월8일 제주지검장, 법원장 등 도내 유력인사 16명, ‘인민군환영준비위워 회’를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체포.구금되었다.
8월10일 제주경찰서는 각 지서주임을 비롯해 북제주군수, 각 읍면장, 청방 대장 및 한청대장을 초청해 상오 11시부터 비상향토방위령에 따 른 자위대 조직에 관해 토의하였다. 비상향토방위령 제6조에 있 는 여자대원에 관해서는 적용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서귀농중 3.4학년 출정 지원자 60여 명이 1일부터 합숙훈련에 들어가 10일 수료식을 가졌다.
모슬포 여한청에서는 단원의 사상통일과 건전한 여성의 호국정 신을 배양하기 위해 10일부터 20일까지 조기회 강좌 및 군사훈 련을 실시하였다.
제주북국민학교에 부설 맹아분교장이 설치되었다.
(8월10일 기계-안강지구 전투)
8월12일 오현중학교 강당에서 전시 도망 피고 강노반(25, 육군 중위) 및 폭동 피고 양석윤(36, 육군정보과 군속)에 대한 육.해군 합동고 등군법회의가 공개리에 개정되었다. 이날 군법회의에서 강노반은 총살형, 양석윤은 금고형 15년을 각각 언도하였다.
대한적십자 제주지사에서는 중문면 하원리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해 의복지 40인분을 배급하였다.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는 “산간 방축 불가/해변지대에 국한”을 내 용으로 하는 우마방축에 대한 단속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8월13일 대한부인회 서귀리분회, 서귀국민학교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청방하사관 교육대를 방문해 중식을 제공하였다.
8월14일 조천과 애월지역 향토자위대조직이 완료되었다.
(8월14일 1훈련소 창설)
8월15일 제주중학교 관악대, KBS제주방송국 개국요원 도착 환영공연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 세이퍼트 중령 등 대사관 관리 17일까 지 제주도 방문.
8월15일 현재 제주도에는 2,254명의 해병대 장교와 병사가 있 으며 이중 1,600명은 신병으로 부산과 포항에서 모집한 360명 을 제외하면 모두 제주출신으로 파악되었다.
8월17일 제주읍 향토방위대, 관덕정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중문지역, 향토방위자위대를 조직하였다.
한림, 한림국민학교에서 향토방위자위대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김충희 도지사, 대구에서 열린 지방장관회의에 참석, 이승만 대 통령으로부터 구호양곡 내려 보내겠다는 약속 받았다.
(8월17일 통영상륙작전)
8월18일 성산, 향토방위대를 조직하였다.
8월19일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 제주비행 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
8월20일 김훈 상공부장관, 전력대책 및 전시 경제건설계획, 제주도 개발 등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였다.
모슬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252명, 군에 송 치돼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됨
표선, 상오 10시부터 표선초등학교 강당에서 800여 명의 대원이 모인 가운데 향토방위대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국제대학 전신인 한국대학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8월21일 청방 독립 제2단, 제11교육대를 설치하였다. 주요임무는 제2국민 병을 징모해 합격된 자를 제5훈련소에 인계하기 전에 1주일간 군사기초훈련을 실시하는데 있다.
8월22일 제5훈련소 창설(국방사연표,1945-1990.국방군사연구소)
8월24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 한라산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한 경찰 전 투 신선대(神選隊) 창설하였다. 당시 잔존 무장대 숫자는 60여 명으로 추정하였다.
8월26일 제주도경찰국, 상오 8시경 무장대 집단을 한라산 서남록 1588고 지(이스렁오름)부근에서 발견해 3명 사살, 다수의 노획품을 획득 하였다.
8월27일 제주도 청년들이 해병3기로 지원 출정하였다.
(8월27일 다부동 전투 개시)
8월28일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 신현준, 어획 특허에 관한 계엄실시 포고 제8호를 발표하였다.
제주부흥사업을 위해 정부요원 10명 및 국회의원 5명과 ECA 미 국인 5명이 내도하였다.
대정면, 대정국민학교에서 입영자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8월29일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 신현준, 등화관제와 도내여행에 관한 계 엄실시 포고 제9호를 발표하였다. 도민의 도내 여행 제한을 해제 해 여행증명서의 발급 필요가 없어졌다. 단 신분증명서를 소지하 지 않는 자와 도외여행에 관해서는 종전과 같다.
해병대, 상부의 명령으로 이도함
8월30일 해병4기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입대식을 가졌다. (신병 1,277명)
(8월30일 팔공산 전투)
9월 UN민간협력단체(C.A.C-United Nation Civil Assistance Command) 부사령관으로 전속되어 온 길버트(Charles E.Gilbert)소령의 적극적 지원으로 최초 경찰악대가 15인조로 편성, 창단하게 되었다.
9월1일 제주도 청년들이 육군 제5훈련소에 입대하였다.
1일 민심계몽선도를 위해 제5훈련소에 정훈부가 설치되었다.
해병3.4기 3,000명 오전에 제주항을 출항
9월2일 계엄사령관측, 3일부터 라디오와 버스운행 제한을 해소한다고 2 일 발표하였다.
조천훈련소, 상오 9시 25분부터 입대식을 거행하였다.
9월3일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 김병휘, 계엄령 제3호 제1항 전 군.관공 리의 요정 출입금지 및 제1항 요리점 영업 제한에 관해 일부 수 정하였다. 제1항 육.해.공 군인은 소속지휘관, 관공리는 소속장이 인정하고 공석에 한해 요정출입을 허가하고 제2항 갑 을종 요리 점의 개업을 허가하였다.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 김병휘, 포고령 제8호를 일부 수정해 어 선 출, 입항은 필히 헌병대의 인가를 얻은 후에 가능하게 하였 다.
제주지구헌병대장 박창록, 모병기피자 및 모략중상자, 유언비어 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9월4일 이응준, 제주도경비사령관 겸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해 6일 제5훈 련소장과 청방단장과 함께 도 일주 시찰을 하였다.
9월6일 청방 제11교육대 한림분소, 의무대를 설치하였다.
(9월6일 영천 전투)
9월8일 중앙청, 전재민을 위해 오백만 원을 지출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2 백만 원은 도내에 도착해 있음. 주로 도두리 및 동국민학교에 수 용중인 570명 이재민에게 배당, 사용될 예정이다.
장두권 대령(제주경비사령부 겸 계엄사령부 부사령관), 새로 부 임해 8일 기자회견을 통해 도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복리증진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9월9일 그동안 일시 정지상태에 있던 제주~부산간의 일반우편이 재개되 었다.
제주도내 청년들, 제1차 소집령으로 육군 제5훈련소 입소하였다.
9일 제주읍사무소에 도착한 북제주군 공문에 의하면 만 17세~ 만 25세까지의 독신자를 대상으로 기초조사에 착수해 총력전에 동원될 것 이라고 한다.
9월10일 KBS제주방송국이 신설 개국하였다.
청방 제11교육대, 제1기 수료식이 10일 상오 9시 시내 향교명륜 에서 거행되었다.
대정면, 10일부터 15일까지 부녀자 계몽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9월12일 경찰 당국, 11일~12일 양일에 걸쳐 한라산 부근에서 무장대와 격전을 벌인 결과 사살 4명, 중경상 3명의 전과를 거두고 군의 피해는 전무한 상태라고 하였다.
9월13일 지금까지 헌병대에서 취급하던 자동차와 선박등록 사무가 민사부 로 이관되었다.
9월14일 도내 사찰관계자, 상오 10시부터 연석회의를 개최해 예비검속된 자 중 상당 수를 신중한 심사 후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15일 종래 사용중인 조선은행권이라 인쇄되어 있던 지폐가 한국은행권 으로 바꿔지게 됨으로써 15일부터 22일까지 금융기관에서 교환 해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23일 이후로는 종래 지폐사용은 불 가능하게 되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9월16일 도내 문화인, 문화구국대를 조직하고 대장에 강석범씨를 선출하 였다.
9월17일 중고등 학도병으로 구성된 해병4기생이 출정하였다. 이들은 곧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오전 10시부터 도 지방법원 법정에서 제1회 군법회의가 열렸다.
9월19일 도 문교사회과,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19일부터 25일까지 청소작업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계엄사령부, 김녕, 서귀포, 모슬포, 한림에 국민의 함을 설치하기 로 하였다.
9월20일 제주개발단, 4.3사건으로 폐허가 된 농가에 우선적으로 복구공사 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 이응준, 계엄실시에 관한 포고 제10호를 명해 포고 제8호는 취소하고 출어구역 및 출어시간 등을 확대 완화하기로 하였다.
문화구국대, 20일 저녁 8시 15분부터 30분까지 제주방송국 마 이크를 통해 서울입성의 노래보급을 실시하였다.
(9월20일 연희고지 전투)
9월21일 예비검속자 48명, CIC(방첩부대) 당국의 재심사를 마친 후 제주 경찰서 후원에서 석방식을 거행하였다.
문교부 기술국장 박철재박사, 21일 서귀포 한림방면의 기술교육 상황과 시설을 시찰하고 본도 어업개발을 위한 서귀포 측후소 설치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9월22일 고원하(용담리), 도로변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해 오던 중 22일 혈병부를 찾아와 일선 장병을 돕겠다고 천원을 기 탁하였다.
9월24일 이정용, 제주경찰서장에 발령되었다.
9월28일 김승윤(19, 대정면 영락리), 9월 12일 해군 해병대 모슬포 헌병 대장 김두삼의 명함을 위조해 관명을 사칭해 다니다가 28일 제 주헌병대의 수사망에 걸려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9월28일 서울수복, 10월1일 국군 38선 돌파)
10월6일 6일 현재 읍내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575명 중 886명이 결식아동으로 나타났다.
10월8일 대한부인회, 일선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문금을 모집하였다.
제주~인천간 전보취급이 다시 개통되었다.
적십자 제주지사, 북초등학교 강당에서 연례회를 개최해 지사장 에 강지수씨를 선출하였다.
10월10일 0시를 기해 어획제한을 전면적으로 해제하였다.
제주도지구 계엄령 해제, 38선 이북 전역에 계엄령 선포
(10월10일 국군 제1군단 원산탈환)
10월12일 제주경찰국장에 이종옥이 발령되었다.
10월13일 조천지서 사찰계장 지휘 하에 조천지서, 함덕지서 및 자위대 합 동으로 무장대를 토벌해 공비 2명을 생포하였다.
10월15일 계엄사령관 주최 야외간담회, 오후 3시 오현단에서 개최되었다.
형무소 설치 기성회, 지방검찰청 주최로 개최되어 회장에 박종훈 씨를 선출하였다.
(10월15일~10월20일 미 제1군단의 평양탈환작전)
(10월17일 국군 제1군단 함흥.흥남 탈환)
10월16일 제주도에 조병창이 설치되었다.
(10월19일 평양 탈환)
(10월25일 중국군 참전)
(10월23일~26일 국군 제6사단의 초산전투)
10월26일 제주도민, 평양탈환 경축 도민대회를 열고 신 국방부장관에게 감 사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10월31일 해군 제3병원이 광양에 위치한 제주농업학교 교사에 신설되었다.
(1952년5월12일 해군 제주병원으로 개칭됨)
(11월3일 미 제8군, 청천강 방어선 전투)
11월19일 김인지, 제주방송국장에 발령되었다.
(11월25일 중공군 2차 공세)
(11월29일 국군 제3사단, 제26연대 혜산진 진출)
11월30일 공군비행단 주력부대가 공군 특기훈련을 받기위해 제주기지로 이 동하였다.
12월2일 성산포경찰서장에 김보현, 모슬포경찰서장 동득춘, 서귀포경찰서 장 김성일이 발령되었다.
(12월3일 국군과 유엔군 38선으로 철수작전 개시)
(12월4일 유엔군 평양포기)
12월5일 제주경찰서, 귀덕출장소. 금릉출장소를 신설하였다.
12월7일 경비계엄에서 비상계엄으로 전환하였다.
(12월14일 원산.흥남철수작전)
12월16일 제주지구 병사구사령부가 국방부 일반명령(육) 제124호로 제주읍 에 설치되었다. 그 후 62년 10월 15일 제주도병무청으로 발족하 게 된다.
제주도 계엄민사부 설치
12월17일 제주도 귀속재산 불하 재개
12월21일 국민방위군 창설(1951년 5월 12일 방위군 설치법 폐기)
(12월24일 국군, 유엔군 및 피난민 흥남에서 철수완료)
12월27일 미 군목 브라이젤과 헤스 미 공군대령이 UN군 사령부로부터 수 송기 7대로 16편에 걸쳐 서울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고아 1천여 명을 제주로 수송하여왔다. 이들은 제주농업학교의 천막과 교실 에 연령별로 수용되어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등을 임시로 마련하였다. 이어서 1951년 4월 황온순은 이들을 보육하기 위하 여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서 한국보육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한국보육원 고문이었던 최승만은 사회부장관 허정의 추천으로 제주도에 온 피난민 구호사업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사회부 제주도 분실장에 임명되었다. 사회부 제주도분실은 직원 6명과 함께 제주 남국민학교에 사무실을 두어 피난민 구호사업 일체를 관장하였다.
12월31일 대한민국항공사 DC-3쌍발기(28인승) 2대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부산을 기지로 전쟁으로 중단된 부산, 서울, 광주, 군산, 제주 등 부정기 운항하였다.
(12월31일 중공군 3차 공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