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고사훈
의병장 고사훈
제주에 유배와서 유생들을 지도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항거를 하다 적지 대마도에서 단신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그 영향은 제주도까지 미치게 된다. 우국충정이 남달랐던 고사훈을 필두로 하여 1909년 2월 25일 제주군 중면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는 제주의 젊은이들이 항일비밀결사 모임을 갖게 된다. 이날 모임 인사는 고사훈을 비롯하여 김만석과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조병상,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 모두 10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고사훈은 이중심과 함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비밀모임에서는 불과 일주일 후인 3월 3일을 기해 관덕정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격문을 통고하는 사람은 고사훈과 이중심 등이다.
모임이 끝난 후 의병장 고사훈과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조병생 등은 그 날로 대정군 영락리와 신평리를 시작으로 의병규합에 나섰다. 대정의 영락리와 신평리로 달려간 고사훈은 영락리와 신평리에서 각각 100명을 규합하고 대정성의 북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에서도 수십 명의 의병들을 규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대정군에서 의병을 규합해 관덕정으로 향하던 의병장 고사훈 일행은 3월 1일 대정군 중면 광청리(현재 안덕면 동광리 일대)에서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게 된다.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의병대는 일본경찰의 급습에 산산이 흩어졌고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되고 말았다.
의병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일본경찰은 고사훈과 김만석을 3월 4일 대정읍 안성리 외곽에서 총살하였다. 고사훈과 김만석이 총살 당하고 의거가 불발로 끝나자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석윤이 체포되고 일부는 다른 지방으로 피신했다. 또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김재형, 부우기 등도 체포되어 유배길에 오르면서, 폭발적으로 조직되어 갔던 제주에서의 항일의병운동은 안타깝게도 고사훈과 김만석의 죽음과 함께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1909년 제주의병항쟁은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이는 일제의 침탈에 대해 도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무력 항일투쟁이었으며, 훗날 법정 무오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농민조합운동 등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운동의 모태가 된다.
(2014.3. 제주인의 항일운동과 민족정기 선양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 격문내용 -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려온 대한제국은 이제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에 의해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다. 신문명, 신사조의 개화기에 처하여 새로운 세계로 진취하려는 민족의 기상은 이제 일본군대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가고 있다. 선대가 목숨을 바쳐 지켜온 이 땅이 외적의 무리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그대로 좌시할 것인가.
슬프다. 국권을 잃으면 노예와 같지 못할지니 백성이 주저 앉으면 누가 나서서 나라를 지키고 부모의 무덤을 돌볼 것인가. 대의에 순하는 자, 영생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 굴진의 굴레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일어서자, 나서자, 그리고 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