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 당시 제주에 온 고아 - 베틀힘
1.4후퇴 당시 제주에 온 고아
김정렬 장군님은 제주도를 훈련장소로 거론했다. 후에 이것을 인연으로 1000여명의 고아들이 “희망의 나라”를 찾게됐다. 한국 서해안 끝에서 60마일 떨어진 이 섬은 직경 20마일 크기의 화산 폭발로 이뤄진 땅이었다. 김장군님은 이미 병사 몇 사람을 파견해 임시기지를 닦아 놨다. 장군님은 이곳이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그러잖아도 우리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이 착상은 무척 고무적이었다. 그래서 대전에는 부대 일부를 남기고, 제주도에는 경험 많은 조종사들을 보냈다. 다시 말해 훈련과 장비는 제주도에서 출격은 대전에서 하도록 한 것이다.
비행기를 제주도로 옮기고, 신참 한국 조종사들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경험을 쌓은 한국 조종사들이 교관을 맡기 시작하고, 미군 장교들이 감독을 했다. 이러다 보니 실전에 투입할 조종사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과는 평균수준이상을 유지했다. 특히 한국 공군 표식이 붙은 F-51에 미군조종사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족을 잃고 떠도는 어린이들을 대면하다 보니 소위 ‘장난감 자동차작전(Operation Kiddy Car)'이라는 일에 말려들게 됐다. 우리부대 병사들은 어디서나 아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뻗쳤는데. 그러다 보니 애들이 더 몰렸다. 아무래도 서울에 고아원을 하나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시작했다. 공군 군목 러쓸 브레이스델 중령이 찾아와, 더 이상 서울 중앙고아원으로 고아들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서울 함락에 따른 조치였다. 당분간 남아있는 구호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한국 부인 몇 명이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이 함락되면 고아원은 문을 닫아야 했다. 블레이드델 목사님과 침울한 상태로 할 말을 잃고 있던 중, 난 갑자기 제주도를 떠올렸다.
당장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난 흥분과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난 블레이스델 목사님에게 한국 해군으로부터 LST를 빌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서울에서 트럭을 구해 아이들을 인천항까지 싣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의 제안에 놀란 표정을 짓던 블레이스델 목사님은 기막힌 착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는 유엔 민간인 사무국 직원과 잘 알기 때문에 트럭을 구하기는 쉽다고 말했다.
그가 서울로 돌아가 있는 동안 나는 LST를 수소문하고 크레그웰 중위를 제주도로 보내 그 농업학교를 인수도록 했다.
수십번의 전화나 무선 교신 끝에 드디어 LST가 마련되었다. 예정대로 블레이스델 목사님은 아이들을 인천 부둣가에 데려다 놨다. 그러나 10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강추위에 떨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약속된 LST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가 추운데다 옷도 얇았던 어린이들 중 허약한 7명이 부둣가에서 죽거나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 LST는 흥남 저수지 쪽에서 퇴각하던 미군 해병대를 구출하기 위해 동해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제 남은 방법은 우리의 C-47수송기를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번에 50내지는 60명만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래서 병들었거나 불구의 어린아이들을 먼저 공수하기로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블레이스델 목사님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김포공항까지 10마일가량 걸어야 겠다. 비행장에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김포 비행장까지 걸어 온 아이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아이들 무리가 구석에서 기다리는 동안 비행장은 말도 못하게 분주했다.
제5공군 본부로부터 도착한 C-54 수송기 15대가 김포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담요와 의약품을 충분히 싣고 공군 간호장교와 군의관들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 어려운 후퇴의 와중에서도 파트리지 대장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송기를 투입한 것이었다.
C-54수송기 출입문의 위치는 꽤 높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일단 트럭에 실은 후 비행기로 들여보냈다.
고아원 건물을 볼 때마다 난 우울했다. 학교랍시고 지어놨지만, 한 번도 손질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진흙과 돌 바닥 위에 세워진 단층 건물의 유리창 대부분이 오랜 풍파로 깨져서, 양철 조각이나 마분지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보수할 만한 재료가 없던 처지라 흉한 모양을 방치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부대 병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기부 받아 식료품이나 의류를 마련했다. 고아원의 관리나 운영은 한국이 두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던 차에 한국 공군 홍상사로부터 이들 두 사람이 구호품을 빼돌려 팔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제주도 시장에 우리 고아원에서 유출된 식료품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두 관리인을 당장 파면해 버렸다. 대통령 부인께서 관심을 갖고 그분의 친구인 황온순 여사님을 추천하였다. 영국에 유학해 사회사업을 공부한 황여사님은 더할 나위없는 적격자였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정상적 교육을 받은 황여사님이 전쟁 소식을 접한 것은 유학생활 중이었다. 전쟁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녀의 집은 무너져 없어지고 아들은 인민군에 끌려가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공식적 기관의 도움이 없이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힘들었다. 우리의 고아들은 서울에서 굶다가 이젠 제주도에서 굶고 있었다. 그러다 백일해가 돌기 시작했다. 크레그웰 중위와 군의관 계소령은 C-47수송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 유행병 예방약품을 구입해 왔다.
제주에는 식수난도 있었다. 처음에는 바닷물을 걸러서 음료수로 썼는데 동네 양조장에 이 일을 했다. 그러나 양조장이 고아원에 1마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물을 길어 오기에는 힘에 부쳤다.
제주도에 정착한지 3개월 만에 고아들 상당수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백일해가 가장 많았다. 이들은 제주도 공동묘지 근처의 울타리도 없는 공터에 묻혔다.
(배틀힘 Battle Hymn. 딘 E. 헤쓰. 2000.6 에서 발췌)
전송가(Battle Hymn)
6.25의 비극을 다룬 미국 영화 ‘전송가(Battle Hymn’). 당시 헐리우드 스타 록 허드슨이 주연을 맡아 1956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제주도로 907명의 아이들을 피난시킨 실화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제주도로 피난한 아이들 중 25명이 미국 텍사스로 날아가 영화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