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한국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

똥맹돌이 2016. 11. 3. 16:00

한국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



미국정부가 1951112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결정한 유엔군의 전쟁지도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한국정부로 하여금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본토 수복을 위해 저항을 계속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엔군 사령부가 수립한 초기의 철군계획(1950. 12.6)에서부터 고려되었으며 1951112일의 결정에 따라 115~19일 콜린스와 반덴버그 장군의 도쿄 방문시 구체적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철군계획 자체가 철저한 보안 하에 논의되었기 때문에 이 중대 사안도 비밀에 부쳐져 전혀 노출되지 않은 채 워싱턴과 도쿄에서 현안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우리 정부에게는 계획의 입안 초기단계에서 군사 상황에 따라 최악의 경우 불가피하게 미군이 떠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도로 의사 타진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1950126일 맥아더 장군이 어쩌면 유엔군이 한국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전황 보고를 해왔다는 보도에 접한 장면대사가 미 국무부에 들어가 유엔군이 중공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경우엔 한국국민은 죽여 릴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국무부(러스크)에서는 미국은 한국전쟁을 포기하거나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 다음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뜻를 전달하였다.

, “미국은 군사적으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미군이 한반도를 떠나야 할 경우, 물론 그런일이 없겠지만,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대사가 원한다면 그것에 대한 의견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면대사는 그에 대해 국군과 유엔군의 전면철수가 있을 경우 제주도와 오키나와가 가능할 것이며 그 때 공무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향후에 유용하게 활용될 군대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이 의사타진은 본국으로 전달되었다. 당시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정부에도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한다라고 전제하고 그 대상 인원을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6,000, 한국 육군 26만명, 경찰 6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가족 40만 명을 포함하고 기타 요원을 고려해 도합 100만 명으로 판단하여 수송계획까지 발전시켰다.

정부 위치는 제주도를 적격지로 결정하였으나 이곳에는 이미 25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과 포로가 수용되어 있어 식수가 부족하여 추가 수용이 불가능한 실정이므로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을 먼저 근해 도서로 이송하기로 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는 않기로 하였다.

멕아더 장군은 이 계획의 검토과정에서 한국인의 철수와 관련된 제반 문제는 유엔과 협의 하에 결정되어야 한다. 철수 장소, 급식문제, 의료지원을 비롯해 최종적 처리문제는 수년간 계속될 문제들이다. 이에 따른 비용 등에 대해서는 유엔군의 철수 여부를 결정할 때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유엔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중공군의 신장된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부산 교두보(낙동강 방어선)를 상당기간 확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철군 시 한국 국민의 처리는 유엔차원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철군여부의 결정은 정치적 결단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1.4후퇴는 한 민족의 운명이 걸려있는 기로였으며 실제 그 운명을 결정할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유엔군 측 지도부는 철군계획을 최고비밀(Top Secret)로 유지하고 미군과 유엔군의 철군계획과 한국정부와 군경의 도서 이전계획을 수립하였음은 물론, 이후 전면전이라는 우발상황에 대비한 유엔군의 재배치 계획과 한국정부와 군.경의 다음 단계의 이동계획까지 수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군을 고려하고 있다는 전략이 적에게 누설되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생각보다도 이 결정이 알려질 경우 아군부대, 특히 한국군에게 미칠 영향을 보다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철군지시는 하달 후 곧 알려질 것이 확실하며, 이는 한국군의 부분적인 붕괴를 초래하기 마련이며 이로써 유엔군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부산교두보에 도달하여 실제 철군에 필요한 기간 동안 그곳을 확보할 능력을 대단히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판단함으로써 이를 한국정부와도 구체적으로 협의하지 않은 채 극비에 부쳤던 것이었다.

그들은 철군 결정 시점을 전선이 금강선으로 남하할 때로 판단하였지만 부산교두보에 도착할 때까지는 철군을 위한 예비명령을 작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유엔군 측은 극비리에 대한민국 정부의 이전계획과 유엔군의 철수계획까지 수립해두고 중공군의 기도와 전선상황의 추이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1.4후퇴는 분명 국운이 걸린 위기였으며 역사의 대 전환점이었다. 이때 유엔군 측은 중공의 참전 실체가 밝혀지면서 5억 인구에 50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그들의 대 잠재력에 압도되고, 또 소련이 그 뒤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전면전의 위험성에 대비하면서 새 전쟁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추가적인 증원 없이는 유엔군을 밀어붙일 여력도 없었으며 일단 38도선 이남, 서울까지 진출하여 정치, 군가, 심리적 이점을 확보하고 춘계공세를 준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로서는 유엔군의 철수를 제2의 인천상륙과 같은 상륙작전으로 자신들을 포위하기 위한 유인전략으로 판단하고 종심 깊은 진출을 기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정공세에서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함으로써 실제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결과적으로 철군 시행 50를 남겨둔 37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적을 저지하고 또한 적이 공세를 멈춤으로서 철군과 정부의 이전계획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당시 피아의 상황 판단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물론 이 계획의 시행시 정부와 군이 유엔군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도서로 이전할지, 아니면 유엔군이 철수하더라도 부산교두보에서 끝까지 저항을 하기로 선언할지 그 선택은 오직 우리의 몴으로서 별개의 상황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밖에도 이 계획은 한국국민의 처리는 유엔이 담당해야 할 문제로 지적하였을 뿐, 후에 월남 패망 시 나타난 바와같이 자유를 위한 보트 피플이 얼마나 많이 발생할지 그 가능성과 대책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튼 이 상황은 우리 민족에게는 도서로 정부를 이전하느냐 아니면 교두보에서 저항하느냐의 운명적 선택의 기로가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상황은 전시에 상대의 기도와 전략의 오판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 국가 운명을 기로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201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