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지
제주성지
제주성은 사료에 의하면 석축이요 그 길이는 5,489척, 높이가 11척인데 격대가 27개소에 화살막이 타첩이 404개이며 동, 서남으로 삼문이 있었고 남북으로 두개의 수문이 있었으니 고,양,부 3을나의 소거지라 하였다.
성안에는 식수가 없으므로 명종 20년(1565년)에 목사 곽흘이 성을 밖으로 쌓아 2중성으로 하고 가락천과 산지천의 물을 성안 사람들이 쓰게 하였다고 한다. 제주는 바다 가운데 고립되어 있어서 중앙정부의 구원이 미치지 못하는 반면 왜구와 해적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일찍부터 기초적 방어수단으로 축성의 방비가 있었다.
제주성의 사축은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나 태종 16년(1416)에 정의성이 축성되고 태종 18년(1418년) 대정성이 축조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제주성의 설치는 훨씬 이전으로 그 역사가 더욱 오래리라고 추측된다. 기록에 의하면 충렬왕 28년(1302)중국에 보고한 공문서중 탐라등처에도 지계(地界)를 나누어서 봉수를 설치하고 병선을 감추어 놓아 밤낮으로 살피고 순찰하여 일본국의 적도(賊徒)를 방어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제주도의 봉수대 설치 시초라고 보아지며 여기서도 제주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므로 제주성은 이때 이미 완성되었거나 이보다 앞서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성은 방어수단의 발달과 시대가 바뀜에 따라 도시화로 인하여 파괴, 철거되어 지금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남아있는 부분으로는 오현단 남쪽을 비롯한 몇 군데에 불과하다.
◦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37-6번지 오현단 남쪽
제주성지
제주성은 제주시내의 중심지를 빙둘러 축조되었다. 언제 처음 쌓여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11년(태종11)정월 제주성을 정비토록 ‘태종실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은 1411년 이전에는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중국동국여지스람’의 기록을 보면 성곽의 둘레가 4,394척, 높이는 11척이라 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 사이에 축성된 규모를 말하며, 지금 성곽의기초가 되고 있다. 1565년(명종 20) 목사 곽흘이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성곽의 규모를 확대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추었다. 1599년(선조32) 목사 성윤문이 성벽의 높이를 더 높이는 등 지금 성벽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어 1780년(정조4) 목사 김영수가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에 피해가 많자 이를 대비하여 간성을 축조하는 등 지속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제주성의 옛자취는 대부분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남아있는 성벽은 조상들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성터 현장 설명표지판)
제이각(制夷閣)
제이각은 왜적을 제압하기 위한 누각이다.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 남문 동측 치성 위에 건립하였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이어서 제주읍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유사시에 왜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대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제이각은 남쪽으로 (ㅗ)자 형을 이루고 있는데 남쪽은 적루(敵樓)이고 북쪽은 장대(將臺)의 구조로 되어있다.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아 이층구조로 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믄 독특한 누대이다. 1555년(명종 10) 6월 을묘왜변으로 제주읍성이 포위당하는 등 위협을 느끼자, 방어책으로 1565년(명종 20) 12월 제주목사 곽흘은 제주읍성의 동성을 동쪽으로 옮겨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은 성곽을 높이고 격대(擊臺)와 포루(砲壘)를 설치하였으며 남성의 제일 높은 곳에 제이각을 세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제주목도성지도에는 청풍대(淸風臺)로 기록되어 있어, 1850년 전후의 평화로운 시대에는 관리와 선비들이 경승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제주성터 현장 설명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