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제주 전사적지

고려시대 역사적 상황

똥맹돌이 2006. 2. 27. 15:36
 

고려시대

1. 삼별초의 항쟁과 몽고 지배기

가. 역사적 상황

고려의 권신인 최씨 집안에서 신변을 보호하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힘세고 용감한 자를 특별히 골라 야간경비를 하게 하였는데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야별초는 그의 아들 최우에 와서는 지방에까지도 파견하여 도적을 잡는 일도 하게되니 그 수가 많아져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졌다. 그후 몽고의 침략을 받게되어 그들과 싸우다 포로가 된 고려군이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몽고와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하였는데 이를 신의군이라 하였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紳義軍)을 합하여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그러므로 삼별초는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그 직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치안과 포도(捕盜), 금폭(禁暴), 형옥(刑獄)까지 담당하였다. 둘째, 도성(都城)의 수위(守衛)와 최씨 정권의 친위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셋째, 몽고와의 전쟁시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였다.

몽고는 중국대륙을 정복한 후 고종 18년(1231년)8월 몽고사신 저고여 피살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계속되는 침입으로 고려조정에서는 몽고군이 육전에는 능하나 해전에는 약한 것을 노리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전국토에 대한 방어대책은 마련하지 못한 까닭에 전국토가 유린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한편 고려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원종은 몽고와 강화를 맺기로 하고 원 세조(쿠빌라이칸)와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원 왕실과 혼인을 맺는 일과 강화도에서 출륙하여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각도에 파견하고 항몽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원종은 김지저 장군을 강화도로 보내어 삼별초의 혁파를 명하였다.

그러자 삼별초는 무기고를 점거하고 항거하여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원종을 적으로 돌리니 이를 ‘삼별초의 난’이라 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년) 배중손 장군과 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강권을 발동하여 천여척의 크고 작은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남하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김방경을 추토사(追土使)로 삼아 몽고의 송만호와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였다. 삼별초가 영흥도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방경이 공격하려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 이를 말이었다. 진도에 주둔한 삼별초는 남해현에 별장 유존혁을 주둔시켜 남해 연안을 지배하였으며, 합포, 금주, 동래, 장흥, 나주, 전주까지 세력을 떨치니 근방의 고을들이 눈치를 보면서 항복하니 한때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고, 장군 고여림과 양동무를 시켜진도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삼별초에 제압당하고 몽고군과 합세하여 싸우도록 하였으나 몽장 아해도 삼별초의 기세에 눌려 공격을 못하므로 원종 12년(1271녀)3월에 혼도로 교체하였다.

원 세조(쿠빌라이칸)는 삼별초의 반란으로 일본 정벌 계획에 차질을 빚게되자 주전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몽연합군으로 진도를 총 공격하게 하였다. 김방경과 혼도는 삼별초와 대치하고 있다가 증원군 6천과 전함 4백척이 도착한 것을 계기로 원종 12년(1271년) 5월15일을 기하여 삼군으로 나누어 총공격하였다. 병력의 열세와 연합군의 화공으로 용장성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등 주동자들은 전사하고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환은 살해되었다. 진도가 함락되자 김방경은 남녀 1만여명과 전함 수십척을 노획하고 양곡 4천석과 재화 다량을 거두어 개성으로 돌아갔다. 이외에 몽고군에 약탈 당한 보화는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조정에서는 진도 공격에 앞서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한 후 탐라로 들어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원종11년(1270년)9월에 영암부사 김수에게 방위군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어 장군 고여림에게도 군대를 주어 탐라 수비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탐라 수비를 위하여 도민을 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 측에서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이문경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문경은 관군보다 2개월 뒤인 11월에 명월포에 상륙하고 곳곳에서 관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명월포에서 조천포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하였다.

원종 12년(1271년)5월15일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니 김통정 장군은 진도를 탈출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앞서 이문경 별장이 장악한 탐라에 들어와서 후일의 재기를 다짐하였다. 이때 남해현에 있던 별장 유존혁도 병선 80척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였으므로 삼별초로서는 사지생환하는 기세였다.

김통정은 한라산 북쪽 귀일촌에 외성은 토성을 쌓고, 내성은 석축하니 이게 항파두성이다. 이 외에 애월포에는 목성을 쌓고, 하귀포를 군항으로 삼았다. 지금 동귀리를 군항동(군냉이)이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통정은 탐라에 들어와서 항파두성을 축조하는 한편 진용을 정비하여 본토 공격에 나섰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 첫째, 몽고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건조하는 병선을 파괴할 것, 둘째, 개성으로 수송하는 공미와 그 수송선박을 탈취할 것, 셋째 몽고인과 몽고에 협력하는 관원 및 조선공을 납치할 것 등이었다. 삼별초는 적극적인 본토 공격으로 수백척의 선박과 수천석의 공미를 탈취하고 몽고인, 조선공들을 납치하는 등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 장악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남해의 각 도서와 해안 고을에서는 탐라까지 조공을 하는 등 삼별초를 매우 두려워 하였고, 몽고는 삼별초가 건재한 이상 일본 정벌은 불가능 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사자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끝까지 항쟁하기로 결의하자 원제는 원종13년(1272년)12월 탐라 공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원종 14년(1273년03월말에 여·몽연합군은 고려군 6천, 몽고군 2천, 한군(漢軍) 2천으로 도합 1만명이 반남현(지금의 나주)에 집결하여 4월9일 160여척의 전함으로 출발하여 추자도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삼별초의 요새가 한라산 서북 기슭에 있다고 하므로 정면 공격을 하면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삼별초를 양단작전으로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배 30척에 풀을 가득 실어 불을 켜고 전선으로 위장시켜 명월포 앞바다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본 삼별초는 여몽군이 명월포로 상륙하는 것으로 알고 김통정 이하 장수들이 명월포로 출진하였다. 김방경은 스스로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4월28일에 함덕포로 상륙하였다. 이곳을 수비하던 삼별초 이시화 등은 죽기를 맹세하고 언덕 사이에 복병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함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적전(敵前) 상륙에 성공한 김방경은 서진을 재촉하여 파군봉에서 승리한 뒤 항파두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명월포 앞바다로 나갔던 선단도 회합하고 귀일포로 상륙하여 김방경 군에 합세하였다. 여·몽연합군은 맹렬한 화공으로 항파두성을 공격하니 필사적으로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김통정의 처 이화선은 남장을 하고 결사대 70명을 거느려 성을 탈출하여 명월포로 달아났다. 부인 이화선으로부터 항파두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김통정은 분통해 하였으나 재기를 다짐하고 선봉장 이문경에게는 군사를 모병하도록 하고 중군장 이순공에게는 병기를 마련하도록 하였으며, 좌익장 조시적에게는 군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인 여·몽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붉은오름에 진을 쳤다.

원종 14년(1273년) 5월6일 출사제를 올리고 여·몽군에 도전하니 김방경은 송보연을 선봉장으로 총공격을 했다. 양군의 혈전으로 산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용장 이문경, 김혁정 등도 분전하다 전사했다. 김통정은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분전하였으나 기진맥진하여 산중으로 퇴각했고 부인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외에 이순공, 조시적 등도 잡히는 몸이 되었으나 끝내 불복하여 참살되었다. 이로써 삼별초는 고종 18년(1231년) 이래 42년간의 항몽혈투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방경은 장군 송보연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뒷수습을 하게하니 그해 윤6월에 김통정의 시체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삼별초가 평정된 후에 몽장 혼도는 몽고군 5백명을 남겨서 불법으로 탐라를 정벌하였고, 한달 후에는 원에서 다루하치를 탐라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전선(戰船) 1천척을 건조하도록 고려에 명하였는데 탐라가 평정되므로 해서 탐라에도 전선 1백척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탐라 인구는 1만 2백여 명으로 고려 조정에서 건조하는 10분의 1을 감당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탐라에서는 온 백성을 동원하여 나무 벌목과 조선공사에 사역된 까닭에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원에서는 고려 조정에게 명하여 탐라 백성과 몽고 주둔군의 식량을 합하여 4만여 석을 탐라에 보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탐라인 중에는 이 고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육지로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망간 탐라인을 찾아내는 ‘탐라도루인물추고색’ 이라는 임시 관원까지 생겼다. 당시 탐라는 몽고와 고려 조정의 물자 징발이 심하여 전선 건조화 함께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충렬왕 2년(1276년) 7월에 초토사를 군민총관부로 고치고 탑라치를 다루하치로 보내었다. 그리고 말 160필을 가지고 와서 수산평(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하였는데 이것이 원 목마장의 시초이다. 탐라는 광활한 초지에 기후가 따뜻하고 맹수가 없으므로 말을 방목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그후 목마가 계속 번식하므로 동서로 아막(목마를 관리하는 벼슬)을 두어 단사관 또는 만호로써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총렬왕 10년(1284년)2월에 군민 총관부를 군민안무사로 고치고 동년 6월 도리첩목아에게 군사 400명을 주어 탐라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동왕 12년(1286년) 5월에 몽고군 400명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대신 고려군 1천명으로 탐라를 지키게 하였다. 동왕 16년(1290년)정월에는 몽고의 반란군 합단이 고려를 침범하자 탐라의 위수병 1천명을 보내어 진압하게 하니 치악성과 충주산성에서 격파하였다. 충렬왕 20년(1294년) 정월에 원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충렬왕은 공주왕비와 함께 연경에 가서 성종에게 「탐라를 고려로 돌려줄 것, 원으로 잡혀간 고려인을 돌려줄 것, 왕과 공주왕비의 작명 책봉을 올려 줄 것」등을 요청하였다. 이에 성종은 왕과 공주왕비의 책봉을 높이는 것은 의논해 보겠다고 하고 다른 두 사항은 승낙하였다.

이로써 탐라의 통치권은 형식상으로는 회복하였으나, 원에서는 탐라를 목마장으로 여전히 사용하고 이에 따른 관원을 파견하였으므로 주권 회복은 말뿐이고 원의 탐라 소유욕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은 탐라의 통치권을 회복하였으므로 충렬왕 21년(1295년) 윤3월에 판비서성사 최서를 목사, 지남익을 판관으로 삼아 보냈고

동년 4월에 탐라를 제주로 고쳤다.

충열왕 3년(1277년) 원에서 죄인 33명을 탐라에 유배시키고 이어 40명을 보내어 왔다.


2.왜구의 침입과 목호토벌

가. 역사적 상황

고려말 제주의 가장 큰 사건으로는 왜구의 침입과 최영장군의 목호토벌을 들 수 있다.

원의 두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이 실패하고 일본에서도 막부정권의 기강이 문란하여 각 지방 호족들이 득세하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 해적들이 출몰하니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 제주에 왜구가 처음 출몰한 것은 고려 충숙오아 10년(1323년) 6월로 추자도에 침입하여 양곡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후 공민왕 원년(1352년)에는 우포(현 한경면 용수리)에 침입하고 동 8년(1359년)에는 대촌(제주시)에 침입하였다.

계속되는 왜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열악한 방어시설과 병력의 부족으로 그들을 제대로 격퇴시키지 못하였으며 조선조 명종 때까지 약탈, 방화, 살인을 자행하였다. 공민왕 17년(1368년) 8월 원 수제가 주원장(명 태조)에게 쫓기어 북으로 달아나니 동년 11월에 사신을 명의 태조에게 보내었다. 그후 명에서도 공민왕 18년(1369년) 4월에 사신을 보내어 왔으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였다. 이어 19년(1370년) 5월에는 책봉사(冊封使)가 왔으므로 고려에서도 7월에 책명(冊命)과 쇄서(曬書)를 보내준데 대하여 사례하고 원에서 받은 금인(金印)을 바쳤다. 이때 아울러 탐라계품표(耽羅啓稟表)를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탐라의 통치권은 어디까지나 고려에 귀속한다. 둘째 몽고인이 목양(牧養)하던 말은 제주관원의 책임하에 목양하여 공마(貢馬)한다. 다만 이리하는 것이 명의 마정관(馬政官)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명 태조는 이외로 “탐라의 통치권은 의당 고려에 속한다. 몽고인의 말은 제주관원이 관리하라. 명에서는 마정관을 파견하지 않겠다. 그 대신 지금 있는 말 중에서 양마(良馬) 2천필을 바치라”고만 하였다. 이리하여 탐라의 문제는 일단락 되었으므로 고려조정에서는 명과의 협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공민왕 21년(1372년)3월에 징마를 위해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때 예부상서 오계남, 비서감 유경원을 유지별감겸 간선어마사로 삼아 제주로 보내었다. 당시 해상에는 왜구가 출몰하므로 오계남은 궁병 425명으로 해상호송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목호(목마장을 관리하는 몽고인) 석가을비(石加乙非), 초고도보개(肖古道甫介) 등은 징마에 불응하여 “우리세조(쿠빌라이)가 기른 말을 원수인 명에 보낼 수 있겠느냐”하며 비서감 유경원과 제주목사 이용장, 권만호, 안방언 등을 죽이고 상륙한 궁병도 300여명이나 살해하니 오계남은 상륙을 못하고 돌아갔다. 판관 문서봉은 피신하여 변을 모면하였는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권지목사(임시 목사직)로 삼고 우인열을 체핵사로 삼고 이하생을 안무사로 보내왔다. 한편 고려에서는 명에 이 사실을 알리고 진마(進馬)가 늦어지는 것과 제주의 목호를 토벌할 것을 말하였다. 아울러 탐라의 왕자 문신보가 말 50필을 진상한 것을 명에 바쳤다.

그러나 명에서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 사신을 보내어 말 2천필을 독촉하였다. 고려에서는 다시 징마하려 했으나 목호들이 순종하지 않고 3백필만 바치겠다고 하므로 공민왕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영으로 하여금 목호를 토벌하게 하였다.

공민왕 23년(1374년) 7월25일에 최영을 제주 행병도통사(濟州行兵都統使)로 삼아 목호를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최영은 8월12일 포획한 왜선 3백척에 동원된 병력을 분승시켜 진도를 출발하여 소한도, 보길도, 추자도를 거쳐 8월 28일 명월포에 정박하였다.

최영은 전 제주목사 박윤청을 목호에게 보내어 귀순하도록 하였으나 목호들은 왕지문서(王旨文書)를 찢고 선발대로 상륙한 11척의 군인들을 모조리 살해하였으며 이하생 목사까지 살해하면서 대병력을 긁어 모아 완강히 항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최영장군은 전군을 독전하여 명월촌으로부터 어름비(현재의 애월읍 어름리)기졍, 밝은 오름지경, 금물오름(현재의 한림읍 금악리)지경, 샛별오름지경, 연래지경, 홍로지경에 걸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공격하니 목자(牧子:목호)들이 견디지 못하여 호도(범섬-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때 전부령 정용으로 하여금 쾌속선 40척으로 포위하게 하자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관음보 등이 스스로 섬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격파하고 항복한 자들은 귀화시켰다.

최영장군은 왕지(王旨)에 의하여 박윤청을 목사로 삼고, 임완을 안무사, 김계생, 석천검을 마축사(馬畜使)로 삼았으며 김인계, 양대생, 엄효충 등과 함께 마필을 관령(管領)하여 수어(守禦)하도록 하였다. 이때 목호마 1700필을 골라 수송하려 하였는데 선박의 수효가 모자라 930필만 분재(分載하)고 나머지 770필을 골라 안무사 임완에게 책임을 주어 뒤따라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9월22일 명월포를 출발하였으나 악풍으로 인하여 11월3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최영장군이 개성에 도착하여 보니 공민왕은 이미 9얼에 환관 최만생, 홍윤 등에 의하여 시해되어 있었다.

여하튼 제주는 원종 14년(1273년)이래 백년만에 이민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