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 전사적지

정난주(마리아)의 묘

똥맹돌이 2006. 3. 9. 15:59
 

정난주(마리아)의 묘

정마리아는 1773년 나주본관 정약현과 경주본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명연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실학자 정약용, 약전, 약용 형제가 그녀의 숙부였고, 어머니는 조선 천주교의 성조인 이벽의 누이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영특하여 난주라 불렸으며 외숙의 교화와 숙부들의 가름침을 받아 세례 입교하였다. 1791년 황사영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출산하였다.

남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16세에 초시, 17세에는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입신양명을 보장 받았으나, 천주교를 접하면서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결혼 직후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알렉산델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1795년 주문모 신부와 명도회를 조직 포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 발각되어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당하였다. 그 결과 그의 어머니 이윤해는 거제도에, 부인 정마리아는 제주도에, 두 살 난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철없는 아들과 추자도에서 생이별 해야하는 고통을 겪었고, 제주목 대정현 관노로 정배된 정마리아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의 덕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다. 끊임없는 순교적 행위로 신고에 찬 삶을 살다가 1838년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한편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 경한은 어부 오씨의 손에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녀가 제주에 유배되어 온지 100주년이 되는 1901년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분개하여 봉기하였던 삼의사는 모두 이 지역 출신이었고, 정마리아의 묘와 삼의사 비는 불과 3km정도 떨어져 있다.

◦ 위치 :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모슬봉 뒷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