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핵화 선언
남북한간의 고위급 회담이 한창 진행중이던 1991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남한 독자적인 비핵화 선언을 하여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 금지조약에는 가입하였으나 국제법상 의무조항인 국제원자력기구와의 ‘전면적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핵사찰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북한의 핵개발 의지에 관해 많은 의혹의 눈길이 주어진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가 먼저 한반도의 비핵화 선언을 함으로써 북한에게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선언에 대해 한국 국민들조차도 반대하는 의견들이 많았으나, 결국 북한이 다음해인 1992년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하는 결과를 가져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갑자기 남한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먼저 선언한 것은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 한반도의 영원한 평화를 갈구하는 한민족의 의지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 비핵정책 선언의 배경
비핵화 선언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와 원자력을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는 한국 정부의 일관된 정책을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그 동안 남북한간의 군사적 대치상황과 북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던 한국은 그 동안 주한 미군의 핵무기 배치 여부에 관해 이른바 NCND(No Comment No Deny)정책을 적용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는 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동서간 냉전이 종식되었고, 계속적인 북방정책의 추진 결과 소련 연방과 중국 등과의 외교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한반도 주변상황이 호전되었음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핵정책도 변경되어야 하며 무모한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91년 한국은 미국과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주로 북한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한반도의 안보문제가 협의되었는데, 안보정책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핵정책 변경에 관한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 또한 1991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은 UN 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남북한간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정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같은 해 9월 27일 부시 대통령의 신핵정책이 발표된 이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미간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유지되는 한 재래식 전력만으로도 북한의 도발을 막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결론을 내린 배경은 걸프전에서 재래식 무기의 우수한 성능이 입증되면서 전술 핵무기의 군사적 효용성이 재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미간의 협의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비핵정책 선언과 관계없이 핵우산 보호를 포함한 대한 안보공약이 확고부동하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 보호는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비핵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안보보장의 일환임을 확인한 셈이다. 실제로 핵우산 제공은 꼭 한반도내에 핵무기를 배치해야 가능한 것은 아니며,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수송 수단에 비추어볼 때 비록 한반도내에 핵무기가 없더라도 충분히 북한의 핵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2. 북한의 핵우산 보호 철회 요구
핵우산 정책은 원래 1968년 NPT 체결과정에서 핵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나라들이 안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함에 따라 핵무기 보유국가인 미·영·소 3개국이 핵 비보유국가에 대해 핵위협 또는 공격을 받을 경우 적극적인 안전보장보호를 약속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핵우산 보호에 관한 결의(225호)를 채택하였다. 미국의 핵우산 보호는 한·미 상호 방위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 한국을 방위하기 위한 안보공약의 일환으로서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정책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런 핵우산 보호의 철폐를 주장한 것은 북한이 제4차 남북 고위급 회담시 내놓았던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 제안에 추가된 것으로, 북한의 핵안전조치 협정 체결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정책 철회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북한이 주한 미군 철수와 동시에 핵우산 철폐를 주장하였으나, 이 주장으로 인해 북한은 핵시설의 사찰 압력을 견디기 어렵게 되었으니, 한국과 미국간의 동맹관계를 악화시키려는 그들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3. 비핵정책 선언의 이행
한반도의 비핵화 선언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한국이 먼저 핵무기의 저장과 배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북한이 주장하던 한반도 내에서의 미군 핵철수 주장이 더 이상 관철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북한의 핵사찰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 선언이 북한의 핵사찰 수용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 더 이상 핵사찰을 거부할 명분을 없앴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북한이 또 다른 구실을 내세워 핵사찰을 계속 거부한다면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 나라는 지속적으로 핵무기의 부재를 공언할 수 있었고, 적어도 남한에서는 북한을 상대로 한 핵무기 개발은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셈이 되어 핵투명성을 전세계에 공포한 셈이 되었다. 그런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대학 등이 주축이 되어 연구하던 재처리와 농축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조차 금지되었지만, 이런 과감한 조치로 인해 북한의 의지를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 국민들도 충분히 협조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핵과 경수로지원. 이은철. 1996.3.15. 서울대학교 출판부 pp82~85)
용어설명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 CTBT)
강대국 사이에 핵무기 보유의 확장이 심해지면서 대기권·수중 및 지하에서 많은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핵실험을 제한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부분적으로 합의를 이루었을 뿐 전면적인 의견 일치를 보기는 어려웠다. 이 조약은 모든 핵실험을 중지하자는 것이며, 기존의 “핵무기가 있는 한 핵실험은 필요하다”는 핵보유국들의 입장이 너무 일방적이었으므로, 비핵국들의 조약체결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였다. 이번에는 미국이 앞장서 전면적인 핵실험 금지를 선언하고 1996년 말까지 모든 핵보유국들의 조약체결을 목표로 교섭중에 있다. 프랑스와 중국은 이 조약 체결 이후에는 핵실험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체결 이전에 충분한 핵실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오히려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횟수의 핵실험을 계획하고 있어 세계 각국의 빈축을 사고 있다.
핵불사용 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 NSA)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의 안전보장을 위해 핵보유국들이 선언한 것으로, 핵보유국은 비핵국들에게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험을 가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다. 핵확산 금지조약 체계를 유지하고 비핵국들의 NPT 가입을 촉구하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어디까지나 강대국들의 선언일 뿐, 만일 그들이 이 선언을 위반했을 경우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그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
적극적 안전보장(Positive Security Assurance: PSA)
NSA의 실효성이 문제가 되면서 비핵국들은 좀더 강력한 안전보장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비핵국이 핵공격이나 핵공격 위협을 받는 경우 핵보유국이 무력조치를 포함한 대응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핵을 보유한 강대국이 전세계에 걸쳐 ‘핵우산’을 펼치게 되었으며, 한국도 미국의 ‘핵우산’ 혜택을 입게 되었다. 현재 PSA도 UN 안보리에 올라 있으나, 비핵국들은 NSA, PSA를 제도화하고 조약화에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록3 북한핵에 대한 기술적 평가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궁금한 대목은 핵무기 개발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준비 단계를 본문에서 자세하게 검토하였다.
먼저 핵원료를 얻기 위한 북한의 준비는 상당히 근접되어 있다고 볼 수있다.
비록 저농축으로 짐작되지만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연구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보이며,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 재처리 시설을 건설중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핵원료 물질은 외부로부터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은 핵원료 물질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준비는 거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원자로에서 연소된 핵연료를 처리하면 연간 최저 5kg 최대 11kg 정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핵원료의 자체확보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기폭장치의 개발
다음은 핵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폭발장치(기폭장치)의 개발 여부이다. 이 점에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북한이 그 동안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있으므로 충분히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측은 이미 북한이 기폭장치의 개발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미국의 한 연구소의 예측은 빠른 시일내에 개발이 완료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짐작하는 것은 북한이 이미 구룡강변에 분화구 모양의 시험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기폭장치의 실험이 수차례 있었던 것으로 위성사진에 의해 짐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과연 핵폭탄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본문 3장의 핵물질 확보 가능성과 기폭장치의 개발로 미루어 판단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핵폭탄을 개발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중요한 기술적인 단계로 기폭장치의 개발 여부를 들고 있다. 이렇게 기폭장치의 개발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원자폭탄의 특수성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다른 폭발물과는 작동되는 원리가 크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포탄이나 미사일은 충격이나 발화에 의해 쉽게 폭파될 수 있다. 그러나 핵폭탄은 그 작동원리가 다르다. 핵포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되기 때문에 폭탄이 완성된 상태에서, 즉 폭발이 가능한 상태로 보관하기 어렵다. 만일 핵폭탄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서 잘못하여 폭발된다면 자체적인 피해가 엄청나기 때문에, 아예 설계할 때부터 다른 포탄과는 다르게 폭발이 되지 않도록 분리하였다가 목표지점에 도달하였을 때에 비로소 다시 폭탄을 재구성하여 폭발이 가능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폭탄의 원료가 되는 물질의 배치구조가 매우 중요하며, 목표지점에 도달해서 폭발이 가능한 구조로 재구성하고 짧은 시간내에 정확하게 폭발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술을 ‘기폭장치’개발 기술이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나라에 패트리어트 같은 성능이 뛰어난 방어용 미사일이 있어 북한의 핵탄두를 공중에서 분해시킬 수 있다면 북한의 핵공격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순한 고철 덩어리에 얻어맞는 정도의 피해만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가 신빈성이 있을 정도로, 핵물질은 폭발 가능한 구조로 재배치되기 전에는 그 위력이 전혀 발휘될 수 없다.
그래서 기폭장치의 개발이 중요하다. 기폭장치란 목표지점에서 핵물질을 한곳에 집중시켜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술로서 원자폭탄 제조에 있어 가장 어려운 기술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기폭장치를 이미 개발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북한이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원자폭탄을 제조하였더라도 기폭장치를 완성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치의 완성을 위해 관련된 많은 실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만일 그 실험을 지상에서 하였다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는 없지만 위성사진을 통하여 실험흔적을 살펴보는 정도로 그들의 수준을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북한 지역을 정찰한 인공위성 사진을 판독해볼 때, 가장 가능한 추측은 평안북도의 구룡강변에 있는 분화구 모양의 지역이 바로 이 실험을 한 흔적으로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이 분화구는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결코 아니며, 어떤 폭발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크기가 핵폭탄과 같은 대형 폭발물에 의한 것으로 보일 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과연 이 분화구의 생성이 핵폭탄의 기폭실험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이런 분화구는 폭발력이 충분한 다른 형태의 포탄에 의해 생성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판단이 서지 않는다.
기폭장치의 실험은 꼭 지상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 규모가 크지 않은 실험이라면 지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장치만의 실험을 위해서는 소규모의 폭약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이 기폭장치를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커드 미사일 같은 무기도 만들 수 있는 북한이기 때문에 기폭장치의 개발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기술은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핵개발 수준을 논할 때, 비록 가장 어려운 기술 중의 하나로 기폭장치의 개발을 들고 있지만, 이 부분을 무시하고 북한이 이미 개발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핵탄두를 적재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이 개발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1945년에 일본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할 때에는 장거리 미사일이 개발되지 않았었고, 비록 단거리 미사일은 있었지만 핵탄두를 탑재할 만큼 성능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B-29를 타고 현장에 가서 낙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레이더와 같은 첨단장비의 발달로 적국의 움직임을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비행기로 운반하다가는 미처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역습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장거리 핵탄두 탑재 가능한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으며, 대륙간 탄도탄 같은 것은 모스크바에서 워싱턴까지 불과 45분이면 날아갈 수 있는 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북한이 이런 고성능의 핵무기 탑재 미사일을 개발하였는지가 북한의 핵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도 방공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스커드-B 미사일
현재까지 북한의 미사일 개발수준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북한이 이라크에 판매한 미사일은 스커드-B형이다. 사정거리가 500km 정도인 스커드 미사일은 순수한 북한의 기술로 개발되어 이미 그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북한은 대남 적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1970년대 중반부터 미사일을 위시한 대공포화 전력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표적인 성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스커드 미사일이다. 북한은 스커드-B형 미사일을 이라크·리비아 등지에 판매하여, 걸프만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북한이 개발한 미사일은 특히 단거리에서는 그 성능이 결코 미국의 미사일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어 제3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북한은 스커드 외에도 탄두 비행거리가 스커드보다 훨씬 긴 장거리 미사일도 개발하여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사정권내에 두려고 하고 있다. 노동1호와 2호는 사정거리가 1,000~1,500k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대포동 미사일은 2,000k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다고 한다. 미사일의 성능을 말하는 정확성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므로, 북한이 탄두 운반기술에 있어서는 충분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핵탄두 탑재 가능성
일반 미사일의 개발에서 북한의 기술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는 점에서는 핵탄두를 적재한 미사일의 개발이 가능할 것인지는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핵탄두는 질량이 가벼운 일반 화약과는 달리 탄두의 부피가 작은 대신 어느 한 부분에 무게가 집중된다. 북한이 안고 있는 숙제는 이렇게 무게가 골고루 분포된 탄두가 아닌 일부만 무거운 핵탄두를 실어 날라야 한다는 것이다. 핵폭탄은 그 위력에 비해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무게는 엄청나다. 우라늄의 비중이 19g/㎤이나 되기 때문에 만일 10kg정도의 탄두를 싣는다면 그 부피는 기껏 전체 미사일의 크기가 몇 미터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집중된 핵폭탄을 탑재한 미사일은 수송 도중에 균형을 잡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미사일이 날아가는 동안에 무게 중심이 흔들려 목표지점까지 정화하게 유도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유도기술
북한이 과연 이와 같이 정밀한 유도기술을 확보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직 북한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북한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려온 과정을 보면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북한의 공학 수준은 일부 특수한 분야에서는 대단히 뛰어나다. 특히 전쟁무기의 개발 능력에서 보면 선진국에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분야, 즉 금속재료 분야나 전자공학 같은 분야는 남한보다 우수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북한이 필요한 부분의 기술을 집중 개발해왔기 때문에 나타난 기형적인 발전이라고 보이며, 특히 컴퓨터 기술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컴퓨터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 적성국에 기술을 판매하지 않았고, 과거 COCOM(대공산권 수출통제 위원회) 체제에 있을 때에는 군사과련 정보산업의 판매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따라서 북한의 무기체계는 기계류를 포함한 중무기들이 대부분이며, 고도의 전자공학을 이용한 무기들의 개발은 늦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미사일의 유도기술은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북한이 구 소련의 유도장치 기술자들을 다수 확보하려다 러시아 등 구 소련연방에 의해 중단된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북한은 이미 한반도를 사정권으로 하는 스커드 미사일을 개발하여 이라크에 수출까지 하였으며, 한반도와 일본까지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1,000km의 신형 미사일인 노동 1,2호를 개발하여 곧 발사시험을 예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이 같은 정보가 정확하다면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탑재하여 운반할 수 있는 기술 확보가 끝났다는 얘기가 된다.
북한, 핵실험이 필수적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필히 몇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수행해야 된다. 핵실험은 수중 핵실험과 지하 핵실험이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이 수중 핵실험을 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왜냐하면 인근 수역이 핵실험에 적합지 않으며, 또한 수중 핵실험은 외부에서 쉽사리 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은 가급적 지하에서 핵실험을 실시할 것으로 보는데, 북한의 지형이나 지질구조로 보아 가능성이 더욱 높다. 지하 핵실험을 하면 그 충격파를 탐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얼마나 폭발력이 큰 실험을 하느냐에 따라 탐지 가능성이 좌우된다. 만일 극소형의 폭탄을 실험한다면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판단은 결코 쉽지 않다. 남한의 여러 곳에 지진 관측소가 있어 계속 핵실험에 의한 인공지진 가능성을 탐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으리라는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을 보면 그 기술을 확보했을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 판단된다.
(pp170~175)
부록1 원자폭탄의 태동
1. 아인슈타인의 편지
□ 맨해튼 계획
미합중국 루스벨트 대통령 각하
.....(전략)
지난 4개월간 미국에서의 ‘페르미’‘질라드’의 연구와 프랑스에서의‘졸리오’의 연구를 통해 다량의 우라늄에서 핵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거대한 양의 힘과 라듐과 같은 새로운 원소가 발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은 또한 폭탄의 제조로 유도되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강력한 새로운 폭탄이 제조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폭탄 하나가 배로 수송되어 한 항구에서 폭파된다면 항구 전체와 인근 지역까지 파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후략)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ien)-
이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대통령은 미국의 생존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곧 이 계획의 자문위원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하루 전날 마침내 개발 연구에 전면적인 노력을 쏟기로 한 미국 정부의 계획시행이 결정되었고, 이듬해부터는 핵무기 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계획은 ‘맨해튼 엔지니어링 디스트럭트’를 줄여서 ‘맨해튼 계획’으로 명명되었다.
2.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1945년 7월 16일 이른 아침 뉴멕시코주의 알라모골드 사막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맨해튼 계획이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인류 최초의 핵실험이 행해진 것이었다. 폭탄을 설치하였던 100피트의 철탑이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번쩍이는 섬광은 6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신무기의 위력은 예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날이 바로 그 유명한 포츠담 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날이었다. 원자폭탄의 실험이 뉴멕시코 주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은 즉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가 있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맨해튼 계획의 추진을 결정하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12일 사망함에 따라 원자폭탄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고, 이어 5월 8일에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7월 초부터 연합군측의 수뇌들이 ‘포츠담’에 모여 회담을 갖는 등 미국이 처음 핵무기 개발을 착수할 때와는 국제정세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개최된 회담 결과 패전 독일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4개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의 포츠담 협정이 조인되었고, 일본에 대한 포츠담 선언이 채택되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내용이며,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는 점에서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고 ‘가미가제’라는 자폭특공대까지 동원하여 최후까지 대항하려는 태세였기 때문에 결국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일본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 1945년 8월 6일 02시 45분 이륙.
• 07시 41분 일본의 1차 및 3차 공격목표 상공의 기상은 양호
• 2차 목표 상공은 불량이라는 기상정보 수신
• 08시 47분 전기퓨즈 시험
• OK 상태 확인
• 09시 09분 목표 ‘히로시마’가 보임
조종사인 파슨스 대위의 아내 이름을 딴 B-29 폭격기 이놀라게이의 당시 항공일지의 일부분이다. 티디안을 이륙한 이놀라게이는 정확히 8월 6일 09시 15분 30초, 농축우라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하였다. 그리고 3일 후인 8월 9일,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원자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마침내 끈질긴 일본도 가공할 핵무기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3. 원자폭탄 개발의 동기
독일의 오토 한이 핵분열을 발견한 후 과학자들은 우라늄의 핵분열 현상을 재확인하면서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큰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같은 질량의 화석연료나 화학적인 폭탄이 내는 에너지의 약 1백만 배에 달하는 엄청난 핵분열 에너지가 실용화된 것은 평화적인 에너지의 이용에만 이용된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엄청난 핵에너지가 군사적으로 이용됨으로써 나치 독일의 히틀러 수중에 가공할 위력의 새로운 무기가 주어지게 될 경우, 전세계는 독일 민족에 의하여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유태인이 받은 처참한 대우가 독일 민족을 제외한 전인류에 파급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언젠가는 개발될 핵무기라면 악마의 손에 금도끼를 쥐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서둘러서 핵무기를 개발할 것을 청하기에 이른다.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 치하를 피해 속박 없이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한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택한 과학자는 무려 6천여 명에 달했었는데 이 중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유진 위그너·에드워드 텔러 등은 신중한 논의 끝에 이 문제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기로 하고, 당시 세계적인 숭앙을 받고 있던 과학자이자 상대성 이론의 주창자로서 물질 속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핵에너지를 예견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찾아갔다. 1938년 8월 2일, 휴양지에서 이들을 맞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핵무기에 이용되지만 그것이 히틀러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진정한 인류평화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질라드가 기초한 편지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4. 전후의 반성 분위기
핵에너지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실제 사용됨으로써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핵폭탄 개발 이후 이 무기의 사용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국제 정치적인 이해관계 - 원자폭탄 개발이 끝난 상태에서 이 신무기의 사용방안 중에는 공개적인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위력을 일본에게 확인시키자는 방안도 있었지만 당시 화폐가치로 20억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투자로 완성된 원자폭탄이 3개밖에 없었고, 그 중 이미 1발은 자체 실험용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두 발 중 1발을 공개 핵실험으로 사용한다면 하나 남은 원자폭탄으로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종전 막바지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선 소련과의 역학관계 등 - 로 인해 실제 사용 쪽으로 결정이 되었고, 결국 일본이 세계 유일의 핵무기 피해국이 된 것이다.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이 여세로 미국은 최소한 10년 정도는 정치·군사면에서 전세계를 압도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됨으로써 미국내에는 평화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위력과 피해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원자폭탄 연구소의 완전한 해체를 제안하였고, 어느 날인가는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면전에서 물리학자들의 손에 묻은 피를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반면에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핵무기의 개발로 얻어진 군비경쟁에서의 미국의 우위를 확신하고 있었고, 최소한 10년 이상의 원자력 기술의 독점과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평화가 당분간 지속되는 듯하였다. 미국 국민들의 대부분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으며 당시 군 내부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국방예산을 줄이는가가 관심의 대상이었고, 병사들의 숫자를 줄이고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데 재능을 보인 지휘관들이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을 정도였다.
5.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이런 평화무드에 젖어 있을 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1949년 늦여름 한 대의 미 공군 B-29 폭격기가 극동기지를 이륙하여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기지로 귀환하였다. 이 B-29의 임무 중의 하나는 비행기에 장착된 특수 사진감광판을 사용하여 지구대기로 들어오는 우주방사선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이날 회수된 감광판을 현상하던 항공요원은 깜짝 놀랐다. 현상된 사진감광판에는 보통의 우주방사선에 의한 가는 줄 모양의 빛 대신에 전체가 뿌옇게 감광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즉, B-29는 방사선 초고밀지역을 비행한 것이었다. 과연 구름같이 많은 우주방사선이 가능한 것일까? 이 분야의 과학자들이 급히 소집되었다. 그 결과 이렇게 많은 우주방사선이 지구대기로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선가 강력한 원자폭탄의 실험이 행해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49년 미국내에서는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가상적국인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곧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영국의 첩보기관을 통해 영국에서도 미국에서 측정된 것과 같은 방사선이 측정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소련에서 원자폭탄의 개발이 완성되어 핵실험이 실시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는 장기간 전쟁에 시달려 평화를 갈망하던 미국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공군은 원자폭탄 감시체제를 비상체제로 전환하였고, B-29에 의해 채취된 분진 샘플을 분석한 결과를 워싱턴에 급히 보고하였다. 분석 결과는 과학자들이 우려했던 대로였다. 더구나 그 분석 결과에 의하면 소련은 미국이 최초로 실험했던 것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우수한 플루토늄 폭탄을 폭발시킨 것으로 평가되었다. 소련이 폭발시킨 것은 조완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과학자들은 조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보다 6배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였다.
6. 소련, 원자폭탄 제조 기밀 훔쳐내다
□1949년 여름,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핵실험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과학자들은 물론 미국의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놀라움과 함께 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연 소련이 단시일내에 원자폭탄 개발능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겠는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소련은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미국에 비하여 과학기술이 훨씬 뒤떨어진 상황에서 그렇게 빨리 자력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해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의 국가안보위원회에서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을 분석함에 있어서 자체 개발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하나는 원자폭탄 개발과정에서의 실험실 사고이거나, 두 번째 가능성으로 미국으로부터 핵물질을 훔쳐서 원자폭탄을 제조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완은 소련이 실제 원자폭탄 실험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미국은 이후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비밀이 유출되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수사를 착수하게 되었다. FBI 수사요원들은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기록과 서류철을 수색하고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범인은 우선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범인은 물리학자이며 외국인으로서 원자폭탄 제조업무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범인 색출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다.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비밀을 훔쳐낸 소련의 세기의 범죄(?)의 시작은 1943년 12월 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버지니아의 노르포크에 정박한 미국 선박 안데스 호에는 몇사람의 영국 과학자들이 승선해 있었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제조를 위해 미국에 온다는 사실은 미국대통령과 극소수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바로 그 배에 영국 과학자들 중에 클라우스 혹스란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다. 혹스는 뉴욕에 도착하여 얼마 후 손에 하DIS 테니스 공을 쥔 채 미리 약속된 거리로 나갔다. 초록색 표지의 책을 든 건장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테니스 공을 신호로 하여 혹스와 레이몬드라는 가명을 가진 중년 남자의 최초의 접선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혹스는 그 후 이 레이몬드라는 인물을 통해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중요한 기밀과 정보들을 소련에 넘겨준 것이다.
□ 드러나는 범죄의 전모
FBI의 수사는 압축되어 차차 원자폭탄 비밀도난의 혐의가 혹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당시 혹스는 영국 원자력에너지 센터의 지도급 과학자였고 명백한 증거가 없어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몇 가지 미심쩍은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중 미국 첩보원에 의해 입수된 나치에 의해 요주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독일 태생 혹스의 기록이 물리학자 혹스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은 물론 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물리학자 혹스와 나치의 기록상의 혹스가 동명이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나치의 기록을 전적으로 맏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것은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한편 1946년 캐나다에서도 소련 간첩조직이 검거되었는데 간첩조직의 명단에서 역시 혹스란 이름이 있었다. 이 정보가 FBI에 전해진 때는 원자력에 관한 소관부처가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였었기 때문에 FBI로서는 혹스에 간한 이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FBI가 원자력에 관한 소관부처가 되면서 이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되자 FBI의 후버 국장은 혹스에 관한 이 정보를 영국 첩보국에 넘겼고 노련한 영국 수사요원들은 그를 미행한 끝에 혹슥 공산주의 첩자임을 포착하여 혹스를 연행하였다. 혹스는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비밀을 소련에 넘겼다는 혐의를 오랫동안 부인하다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결국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다.
□ 혹스, 마침내 입을 열다
그는 1941년 소련에 다녀온 이후 핵에 관한 기밀정보를 계속 넘겨주었으며, 그의 미국행이 결정되자 소련 기관원으로부터 레이몬드와 접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혹스는 레이몬드라는 인물과 접촉하면서 맨해튼 계획과 관련된 중요기밀을 소련에 넘겨주다가 결국 꼬리가 잡힌 것이다. 혹스는 1950년 2월 3일 구속되어 4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혹스로부터 정보를 받아 소련 대사관에 넘긴 레이몬드라는 이름의 미국인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유일한 단서는 그 남자가 화학에 가한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화학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뿐이었다.
수사관들은 수많은 화학자들의 기록을 일일이 검토하며 탐문수사를 벌였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지워지고 해리골드라는 이름이 남게 되었다. 수사관이 골드에게 혹스라는 인무로가 접촉한 사실을 추궁하자 골드는 혹스를 신문에 난 사진을 보아 알고 있을 뿐이며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즉 뉴멕시코 주에 전혀 가본 적도 없다고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FBI 수사관들에 의해 골드 집에서 뉴멕시코 주 센타페이 지방의 지도가 발견되자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되었다. 골드는 혹스로부터 받은 정보를 소련 부영사인 야코프레프에게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 골드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혹스만이 이 사건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로스알라모스에서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던 그린 글래스 중사도 골드를 통해 원자폭탄의 핵심 기계장치에 관한 설계도면을 포함한 중요한 비밀을 소련에 넘긴 것이 밝혀졌으며, 골드를 연락책으로 한 이 간첩조직의 핵심인물인 로젠버그 부부가 마침내 검거되었다. 로젠버그는 그린 글래스 중사의 여동생인 에텔의 남편으로서 이들 부부는 열성 공산당원이며 원자폭탄 스파이 사건의 핵심인물로 밝혀져 그들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린 글래스에게는 15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소련은 이들이 넘겨준 비밀정보로 손쉽게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원자폭탄을 손에 넣게 되자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앞세워 한국전쟁으로써 세계 공산혁명을 꿈꾸는 그들의 속셈을 드러냈다. 만약 원자폭탄 제조기술이 간첩들에 의해 소련으로 유출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은 그렇게 빨리 원자폭탄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pp15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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