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관련

낙동강방어선전투

똥맹돌이 2014. 11. 3. 10:52

낙동강 방어선 전투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낸 낙동강 일대의 방어전투. 북한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말, 북한군은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라고 불리는 동남부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km, 남북 160km로,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남지읍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 방어선 안의 지역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으로부터 마산.대구.영천.포항 등의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의 병참전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이동에 유리하였고, 기동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하여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최소의 전투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선작전의 이점을 살리기에 적합한 범위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의 돌파에 대비하여 그 후방에 또하나의 예비방어선을 마련하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서 미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이 경상남북도 경계를 이루는 산맥과 밀양 북쪽의 유천과 그 서쪽의 무안리를 거쳐 마산 동쪽의 고지들로 이어지는 총길이 90km의 데이비드선을 구상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책임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처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연결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8월초까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 보병사단이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은 8월초에서 9월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방어병력을 적시적소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8월중 마산방면에서는 북한군 제6사단의 공세를 미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 특수임무부대가 선제 역습으로 저지하였고, 창녕에서 남지 사이에 형성된 낙동강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수개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포항-기계-안강을 잇는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 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군의 전선돌파를 분쇄하였다. 또한 대구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제1사단이 북한군의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특히 미 공군은 8월 16일 B-29폭격기 98대로 왜관 전면의 북한군 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으며, 특히 영천일대에서는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 예하가장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이래 큰 전승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만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와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북한군의 주력을 무찌르는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6,25전쟁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해병대 4,000명 총맞아 죽고 얼어죽고...   (0) 2014.12.03
6.25전쟁 당시 피난길  (0) 2014.11.27
6.25전쟁 주요전투 목록  (0) 2014.10.24
백두산함  (0) 2014.10.14
6.25전쟁 호칭에 관한 용어해설  (0) 2014.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