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훈련소에 입소하는 제주청년들
38선 전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이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쳐내려왔다는 소식이 제주에 전해진 것은 26일 정오경이었다. 당시 언론매체가 발달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쟁발발 소식을 이튿날 등교하였다가 학교당국 발표에 의해 전황을 알게 되었다. 항상 되풀이되는 국지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도민들은 28일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긴장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구계엄사령부가 설치되어 신현준 해병대령이 사령관에 취임하고 참모장에 김성은 중령이 취임했다. 사령부는 도청으로 이용되던 관덕정을 사용하면서 도내 치안확보와 해안경비 임무 수행을 위해 경찰, 검찰, 법원 조직 등을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하였다. 또한 치안유지와 함께 해상을 통해 상륙할지 모르는 적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제주시와 주요 지역에 경비초소를 강화하는 한편, 해안감시 및 해상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김충희 지사를 비롯한 모든 도청직원들도 청사 한쪽 방에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계엄사의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해병대가 전선을 향하여 군산, 장항으로 투입되면서 해병대가 맡았던 무장대 진압작전은 경찰이 독자적으로 전담하게 된다. 경찰은 제주도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의용경찰대와 향토자위대를 조직하여 경찰업무를 보조하게 하였다. 당시 군관민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재산무장대 잔존세력의 발호와 공격이었기 때문에 혈기있는 젊은이들이 나서 후방에서의 역할이 절실하였다. 한편 7월 26일에 제주도개발단이 강경옥의원의 건의에 따라 비전투지역인 제주에 미국의 대외원조 ECA를 끌어오기 위해 제주항이 도착하지만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재건이 급선무라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전황은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남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일미군이 전선에 투입되지만 잇달아 패배하면서 급기야 금강산 방어선마저 허물어지게 된다. 그리고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호남지방을 거의 유린한 다음 서부 경남일대에 까지 침공. 대전지방에서 내려오는 적의 주력과 더불어 대구와 부산을 공략하기 위한 공세를 펴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참전군이 도착하면서 전쟁 초기의 혼란했던 지휘체계가 점차 안정을 찾게 되는 7월 중순, 대구에서 최초로 제1보충병 훈련소가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김해에 제1훈련소, 구포에 제3훈련소, 제주도에 제5훈련소, 삼랑진에 제6훈련소, 진해에 제7훈련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제주주정공장
특히 제주도는 부산과 함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자원을 공급하는 전략기지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정부는 1950년 7월 16일 산지천 서쪽 제주주정공장 자리에 육군 제5훈련소(소장 김병휘 대령)를 설치하여 본부를 제주항 동부두에 있는 주정공장에 두고, 제1교육대를 모슬포 대촌병사에, 제2교육대를 한림국민학교에, 제3교육대를 제주읍 주정공장에, 제5교육대를 제주농업학교에 각각 설치하였다. 또한 서귀국민학교에 서귀독립대대와 김녕국민학교에 김녕대대를 두었는데 이곳 육군 제5훈련소에서 배출된 병력은 일일 평균 750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육군 제5훈련소에 입소한 장정 대부분은 만 17세 이상의 어린 제주출신 청년들이었고 나머지는 피난민들이었다. 고급장교와 하사관 또한 소수의 기관요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제주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직접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들이었다.
이들은 청년방위대 간부후보생 4기 모집에 선발된 200여명의 19세에서 20대의 젊은이들로 1950년 3월 1일 충남 온양의 육군방위사관학교(육군예비사관학교 후신)에 입교하여 간부후보생 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구대장 후보생, 중대장 후보생 등 학생간부들은 모두 제주출신 후보생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1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수료와 함께 3월 31일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후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그들에 의한 간부후보생 과정은 몇차례 더 계속되었는데 당시 제주에 있던 일부 육지출신 청년들을 포함하여 이때 제주도에서 나가 이 학교를 수료한 동기생들은 모두 2백45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온양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그해 4월 제주도에서는 청년방위대가 조직되었다. 청년방위대는 본격적인 군사조직이나 민병은 아니었지만 반공, 치안유지에 협력활동을 하였다. 이들 예비역 장교들은 도단본부, 지대, 편대, 소대의 각급 지휘관 및 참모로서 청년방위대 지도감독 업무를 맡았다. 청년방위대가 발족된지 불과 두달만에 6.25전쟁이 발발했으므로 일반대원들의 기초훈련은 물론 향토방위의 임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황에서 있었지만 이들 예비역 청년장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시체제를 신속히 확립, 활발히 전개된 징모업무는 제5훈련소 창설의 기틀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 혈기왕성한 청년장교 185명은 자진하여 훈련소 신병훈련 교관으로 복무하였고 현역장교로 소집되어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간장교로서의 임무를 탁월한 기량으로 수행하였다. 이들이 지휘하는 군사훈련은 어느 기성장교 못지않게 뛰어났으며 한 달간의 단기간에 기초 훈련을 모두 마치고 전투요원으로 길러진 사병들은 비장한 각오로 전선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그때 제1진이 떠난 것이 1950년 8월 하순이었고 그로부터 몇 차례에 나눠 제주출신이 주축이 된 모든 장병이 군 수송선에 의하여 부산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이들 제주도에서 양성된 전력자원을 토대로 창설을 본 것이 이른바 화랑사단으로 알려진 보병 제11사단이다. 이 11사단은 1950년 8월 27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54호에 의거 경북영천에서 창설되었는데 사병의 60%가 제주출신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예하부대로 보병 제9연대, 13연대, 20연대 등 3개 보병연대와 제20포병대대 공병대대 등을 배속받았다. 특히 제주병력들은 평소 사병들 간의 대화를 제주사투리를 사용하여 소통하였으며, 타 지역 출신 사병들보다 학력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작전이나 지시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여 명령이행이 잘되었고, 특히 4.3사건의 영향으로 반공정신이 투철하였다고 한다.
보병 제11사단은 예하부대로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서귀포에서 창설된 보병 제9연대(초대 연대장 장창국), 1948년 5월 21일 충남 온양에서 창설된 13연대(초대 연대장 이치업 대령), 경남 삼랑진국민학교에서 창설과 동시에 11사단에 배속된 20연대(초대연대장에 박기병 대령)등 3개 보병연대와 20포병대대, 공병대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마산-왜관-포항으로 이어진 낙동강전선에서 적을 소탕하는 작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어 반격에 교두보를 이끈 주역이 된다. 이후 화랑사단은 1951년 4월 제1군단에 배속되어 동부전선에서 양양.설악산지구전투, 대관령지구 전투, 884고지전투, 월비산고지전투 등에서 수많은 전공을 남겼고, 이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건봉산, 향로봉, 564고지, 간성지구, 고성지구, 삼현지구 전투에서 우리 군의 승리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특히 6.25전쟁 기간 동안 참전했던 젊은 장교 185명은 육군 제5훈련소, 부산 제2훈련소, 보병 제11사단을 주축으로 그 후 보병 제5사단, 제8사단 외에 전군에 배속되어 영.호남 패잔병 소탕작전, 동부전선, 중동부전선을 비롯하여 모든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39명의 고귀한 생명을 전선에 바쳤고, 수많은 장교가 전상을 입었다.
그리고 육군 제5훈련소는 1951년 3월 21일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1950년 8월 14일 창설)와 부산의 제3훈련소,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해 1951년 3월 21일 육군의 단일 신병훈련소인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인엽 준장)가 제주도 모슬포에 창설되면서 해체된다.
한편, 당시 제주도에서는 7월 16일에 1만 여명의 피난민이 제주, 한림, 성산, 화순항을 통해 군용LST와 여객선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공공시설에 분산 수용되었으며, 6.25의 포성이 바로 바다건너 목포에서까지 들리던 8월 9일, 목포를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국군은 낙동강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힘겨운 방어전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이런 기박한 상황 속에서 제주에서는 느닷없이 주요기관장을 비롯한 변호사, 사업가 등 이른바 지방유지 12명이 전격 구속되는 ‘유지모함사건’으로 도민들을 놀라게 한다. 더구나 학원가에 민애청(민족애국청년동맹)이라는 좌익단체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보가 군 당국에 제보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학생들은 전황이 악화되면서 목총을 만들어 매일같이 군사훈련에 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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