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士 吳興泰之閭
위 치 :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416
건립년대 : 1794. 7.(1991년 재건립)
이 비는 吳興泰(오흥태) 義士의 충의정신을 널리 알려 국민으로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정신을 후세들에게 선양하기 위해서 건립하였다.
오흥태는 난산리에서 출생하여 聞望으로 널리 알려졌고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를 굳게 지켰다. 영조 4년(1728)에 역적 李麟佐(이인좌) 등이 반역의 뜻을 품고 준동하자 국난에 나가서 충성을 다할 것을 결심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서 3개 읍에 격문을 돌렸다. 이 격문에 따라 근왕병 수백 명이 모여 적진으로 출발하려던 중 平亂의 소식이 전해지자 출병을 중지하였다. 정조 18년(1794)에 조정에서 의사로 정표되었다.
비문내용(해설문)
오흥태는 정의 난산리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부진런히 공부를 하고 과거에도 몇 번 응시한 바 있으며 문학과 文望으로 널리 알려졌다. 성품이 강직하고 세속에 쏠리지 않았고 의리를 굳게 지켰다. 1728년(영조 4년) 역적 이인좌 등이 반역의 뜻을 품어 준동하자 오흥태는 국난에 나가서 충성을 다할 것을 결심하고 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3읍에 격문을 돌려 이르되 “인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임금과 어버이요, 충성과 효도이므로 만약 자식으로서 부모의 괴로움을 구원하지 못하고 백성으로서 나라와 임금의 어렴움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금수와 다름이 없다.” 이제 우리 성상(영조대왕)의 덕화가 온 백성에 두루 미쳐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때에 뜻밖에 흉적의 무리가 반역의 음모를 꾀하고 있으니 불구대천의 적이다. 더구나 지난 癸巳, 甲午(숙종 39, 40년)의 대흉년에는 좁쌀 4만 섬의 진휼 혜택을 입어 우리 부모 처자가 생명을 이었으며 성상께서도 부왕의 뜻을 이어 제주도민을 특별히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 제주도민도 국난에 나아가서 성은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전쟁의 승부와 일신의 생사를 생각하여 진퇴를 정한다면 어찌 忠義의 도리라 할 것인가? 3읍의 혈기 있는 남아들은 다함께 뛰어 나가서 一死報國한다면 이 위에 없는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 격문에 따라 근왕병 수백 명이 모여 적진으로 출발하려고 하던 중 平亂의 소식이 전해지자 모처럼 준비한 출병이 중지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조정에서 義士로 정표되었으며 오늘날도 그 충효를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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