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북한출신의용군
한때 원주민의 50%선을 훨씬 넘는 15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의 대거 입도는 질서유지와 공안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었다.
학교, 공회당 등 공공시설은 물론 중류이상의 민가에는 어디를 가나 피난민이 끼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일 문제되는 것이 역시 생계대책이었다. 그 심각한 양상은 1.4후퇴 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집을 얻지 못해 천막을 치고 집단생활을 했던 사람 중에는 단체행동이 익숙치 못하여 여러 가지 말썽의 씨를 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이 그들에게 배푼 연민은 지연과 혈연을 초월한 것이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궁핍 속에서도 먹을 양식으로 주먹밥을 제공했고 거처가 없어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손수 집으로 안내하여 한식구처럼 따뜻한 정을 베풀었다.
이런 가운데 빙탄술상용(氷炭不相用)격이던 원주민과 피난민과의 서먹한 관계는 난국을 극복하는 정겨운 동포애로 승화되어 갔다.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던 배타관념이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독신으로 내려온 피난민과 인연을 맺어 혈연을 형성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고지를 찾아가거나 또는 대개의 남한출신들이 귀향한 후에 제주도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제주처녀와 인연을 맺은 행운아들이었다.
6.25를 회고하여 피난민을 생각할 때 지워버릴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북한공산군이 대전을 압박할 무렵인 그해 7월 10일이었다.
이북 5도 출신으로 구성된 2백여명의 젊은이들이 동부두에 있는 주정공장에 모여들었다.
제5훈련소가 창설되기 1주일 전의 일이었다.
강제로 끌려가거나 누가 나오라고 해서 형성된 모임이 아니었다. 자진집회였다.
그들은 어느새 주정공장 중역으로 있던 황해도 출신 손득정을 지휘관으로 추대했다.
『지금 공산군이 물밀듯이 쳐내려오는데 그들의 학정이 싫어 월남한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 없지 않은가. 만약 남한이 적화되는 날이면 우리는 갈데없이 다 죽는다.
죽을 각오로 나서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일치단결하여 총을 들자.』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 지원한 군번도 계급도 없는 의용군들이었다.
겨우 총쏘는 법을 터득한 이들은 당시 광주에서 항전하고 있는 국군 제5사단에 편입하기로 작정하고 제1진인 50여명이 닷새 후인 15일 광주에 도착, 선발대로 일선부대와 합류했다.
곧이어 1백여명으로 편성된 제2진이 목포로 향발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후인 7월 25일이었다.
영동지구에서 개전 이래 최대의 격전이 벌어지고 신태영 소장이 이끄는 전북지구전투사령부와 이응준 소장이 지휘하는 전남지구전투사령부가 임실, 남원, 광주, 순천을 거쳐 철수를 거듭한 끝에 마산에 상륙하기 이틀 전의 일이다.
호남으로 침공한 적군이 거의 이 지방을 유린하고 있을 때였다.
무전시설까지 갖춘 화물선에 탄 의용군 제2진의 인솔자는 한재길 경감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해군헌병하사였다.
비장한 각오로 일선에 출동하는 이들에게는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무언의 동지애만이 서로의 얼굴을 감쌀 뿐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진도앞바다를 항진할 무렵이었다. 무전기 앞에 앉아 있던 통신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큰일났습니다. 목포에 이미 공산군이 들어왔다는 통신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행선지 목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전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배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기왕 출동한 이 마당에 뱃머리를 제주로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선수를 동쪽으로 돌려 고흥반도에 다음날 새벽 당도해보니 그곳 역시 적이 진주해 있다는 어두운 소식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이런 각오아래 여수 앞을 통과할 26일 아침이었다.
어디선가 따따따 하는 총성이 들리는가 했더니 어렴풋이 보이는 육지에서 무장한 공산군들이 소련제 장총을 쏘아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리탓인지. 의용군이 타고 있는 배에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는 못했다.
해상기동력이 없어 쫓아오지 못하는 적병을 응시하며 다시 동쪽으로 항진을 계속한 끝에 거제 근해에 있는 욕지도에 닿은 것이 그날 하오였다.
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피난선들이 갈 곳을 정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광주에 주둔하던 제5사단이 이 섬에 철수하여 반격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철수한 병력 가운데는 앞서 떠난 의용군의 제1진이 풀죽은 얼굴로 반가이 맞아 주었다.
욕지국민학교에서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웅성거리는 피난민의 대열 속에서 제5사단장 이형석 준장을 만났다.
의용군들은 반가움에 겨워 이 사단장을 애워쌌다.
『우리는 스스로 의용군을 편성, 일선에서 싸우기로 자원 출정했습니다. 현역병과 똑같이 부대에 편입시켜 주십시오.』
강경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 준장은 이쪽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패기만만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는 사정과 인도를 먼저 내세웠다.
『나는 패군지장(敗軍之將)이오 육군본부에 여러분을 편입시킨데 대해 보고할 면목이 없소. 더구나 우리에게는 군복도 군량도 무기도 없소. 여러분의 뜻은 가상하오만 다음을 도모합시다.』
사복으로 떠났던 이들에게 군량도 무기도 없다면 그야말로 오합지중(烏合之衆)외에 무슨 구실을 하랴.
눈물을 머금은 퇴진이었다.
타고 갔던 화물선에 일행이 다시 승선하여 제주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지금 당시의 피난민들은 도내 곳곳에 분포하면서 상주하고 있다.
거의 이북 5도출신인 이들-.
두고 온 산하, 가고픈 고향의 망향의 정을 달래며 조국의 통일을 누구보다도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제2의 고향 제주가 후손에게 승계할 제1대의 정착지인지도 모른다.(계속)
출처 : 도제50년 제주실록. 199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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