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유적지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똥맹돌이 2015. 5. 21. 11:39

 

 

 

 

독립군 군자금 모금운동

 

1919년 독립희생회의 연락원 김창규가 임시정부 선포문과 해외통신문 등을 가지고 제주로 왔다. 그는 제주교회 김창국 목사와 조봉호. 최정식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희생회를 조직하여 회원 1인당 2원(당시 쌀 한가마에 4원이었음)을 헌납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고 모금에 착수하였다. 조봉호와 최정식은 이를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등사하였는데, 법원에 있는 등사판을 고용 직원 김창언이 밤중에 몰래 최정식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등사물은 교회를 통하여 배포되었다. 제주교회 김창국 목사는 구좌면 세화리로부터 한림읍 수원리까지, 대정교회 윤식명 목사는 한림리로부터 중문리까지, 정의교회 임정찬 목사는 서귀.남원.표선.성산을 각각 맡아 동시에 배포하였다. 도민들은 적극 호응하여 짧은 시일 내에 회비를 모아 송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단이 왜경들에 적발되었고, 비상경계령이 내려 주동자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조봉호 등에 의해 관련된 60여 명이 구속되었다. 조봉호는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자진하여 함께 구속된 동지들에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미루도록 하였다. 같은 해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최정식은 3년, 조봉호는 2년, 문창래는 6월의 형이 언도되었다.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여 같은 해 11월 12일 최정식 1년 6월, 조봉호 1년, 문창래 무죄로 확정되었다.

조봉호는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조봉호는 귀덕리의 부자 조만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료에 귀의하고 제주교회 창립 당시에 이기풍 목사를 도와서 조사로 일을 보았고, 애월읍 금성리 교회를 세우는 데에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에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바치고 38세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가 옥사할 때 가족들이 동가식 서가숙하였기 때문에 그의 유해조차 거두지 못하여 그의 무덤이 없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63년 3월 1일 건국 공로훈장을 그의 유가족에게 내렸다. 1977년 사라봉 기슭에 세운 모충사에 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그에게 순국지사의 칭호가 붙여졌다.(증보 제주통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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