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6.25전쟁 당시 주요전투

똥맹돌이 2008. 1. 18. 10:33
 

6·25 주요전투


1. 춘천방어전투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원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북한군은 공격 당일에 춘천·홍천을 점령하고 서울을 포위를 위해 이천-수원으로의 우회 할 계획이었으나, 소양강과 말고개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5일 동안의 방어전으로 북한군 제2사단의 서울 진출을 봉쇄하고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살상 6,800여명, 포로 120여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하였으며, 아군은 전사 200명, 부상 350여명, 실종자 1,300여명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였다.


2. 한강 방어선과 맥아더

1950년 6월 28일 02 : 00 북한군 선두가 미아리에 진입하면서 서울 북방 창동방어선이 붕괴되고 02 : 30 분경에 한강교를 폭파하면서 한강 방어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 6월 29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한강방어선 시찰을 위하여 일본에서 전용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릴 때, 맥아더 장군은 마중나온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북한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한강방어선을 직접 둘러보면서 맥아더 장군과 한국 병사와의 사이에 나눈 일화는 맥아더 장군의 한국방어 결의를 확고이 다지게 하였다

맥아더 장군 : 자네 언제까지 그 호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군 병사 : 옛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 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을 따를뿐입니다. 저의 직속 상관으 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 입니다.


맥아더 장군 : 그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군 병사 : 옛! 죽는 순간가지 여기를 지킬 것 입니다.


맥아더 장군 : 오! 장하다! 자네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한국군 병사 : 옛! 그렇습니다. 각하!


맥아더 장군 :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와서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한국군 병사 :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머그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 를 까부술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장군 : 음! 그리고 또 없나?


한국군 병사 : 옛!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 : 알았네 여기까지 와본 보람이 있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고있던 김종갑 대령 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 정일권 장군 회고록에서 -



3. 오산전투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에 따라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7월 1일 부산, 7월 2일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처치 장군으로부터 평택·오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날밤 부대를 이동하여 오산과 평택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제52포병대대 A포대를 합류하여 보포를 통합한 하나의 특수임무부대를 구성하였다.


오산전투는 6.25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파병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 07: 00경 수원 부근에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이 남진하는 것을 죽미령 일대에서 보·포 협동으로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적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한 방어전투를 말한다.


스미스부대는 죽미령에서 철수시 동측방으로부터 적의 공격에 병력이 분산되는 등 많은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150여명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으며, 적은 전사 42명, 부상 85명, 전차파손 4대였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낙동강 방어와 반격

낙동강 변 마산, 밀양, 대구, 영천, 포항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감행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낙동강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이 계속 증강되는 반면에 북한군은 유엔군의 후방 차단으로 전력증강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다시 8월 31일부터 부산 점령을 위하여 예비부대까지 동원하며 전면 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유엔군이 적 후방과 해상로를 원천봉쇄하고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막아낸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인천상륙부대와 연결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 09시에 낙동강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9월 16일, 비가 오는 악천후 속에 반격작전이 시작되었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북한군의 저항이 완강하였으며, 비가 그친 18일 B-29폭격기 42대를 동원하여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였으나 진전이 없어 고심하던차에 한국군 제1사단이 반격의 돌파구를 만들었다.


국군 제1사단이 인민군이 점령한 가산산성 우측계곡에 인민군부대가 없음을 알고 신속하게 돌파하여 19일에 `갈뫼'를 점령하고 인민군 제1, 제3, 제13사단의 동측 퇴로를 차단하므로서 북한군 3개 사단이 철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19일 14시경에 왜관을 탈환하고 저녁 무렵에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 1주일만에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5.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북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의 후방을 기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므로써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작전이 필요하다고 구상하고 실행하기까지 미 합참과 극동해군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힘겹게 설득하고 감행하여 전사에 길이 남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극동군 제7함대를 제7합동기동함대로,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을 새로 편성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미 제7사단, 국군 제17연대 등으로 편성하였다. 이로써 상륙부대는 함정 260척, 지상군 병력 75,000여명 규모가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02시 세차게 몰아치던 태풍이 소멸되자 인천상륙명령이 하달되자 19척의 선두함대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월미도 등대의 유도로 인천항을 향해 전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1단계 월미도 점령이며, 2단계가 인천상륙과 교두보 확보이다. 따라서 월미도에는 9월 13일부터 대대적인 공중폭격과 함께 등대확보를 위한 특수작전을 감행하여 9월 15일 08시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썰물이 시작되어 할 수 없이 함대는 먼바다로 물러나 만조를 기다렸다. 16시 45분 다시 만조가 시작되자 유엔 해·공군 폭격과 해병대가 상륙하여 9월 16일 새벽에 인천시가지를 장악, 9월 18일 아침 김포 비행장을 점령, 19일 밤에는 영등포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은 9월 17일부터 상륙하여 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6.평양탈환작전

평양탈환작전은 북진 당시 서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중부전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와 함께 평양을 포위공격하여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으로 편성된 8,000여명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평양을 탈환한 공격작전이었다.


10월 9일 38선을 돌파한 미 제1기병사단과 2일이나 늦게 고량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국군 제1사단이 평양탈환을 목표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한다"라는 지시에 따라 제7사단과 제8사단도 뒤늦게 평양 점령 경쟁에 합류하였다.


10월 18일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 국군 제2군단의 평양을 포위하여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북한군은 평양 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대동강 및 동평양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한 저항을 하였다.


10월 18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남쪽 12㎞ 지점인 흑교리 근교에서 적의 대전차포와 120미리 박격포사격을 받고 진출이 지연되자 제5기병연대를 투입하여 대동강 지류인 무진천을 도하하여 11: 02분에 동평양을 점령하였다.


10월 18일 아침 국군 제1사단은 미 제6전차대대 2개 중대와 보·전협동으로 진격하였다. 제11연대가 대동리 못미처 관음산과 반용산 사이에서 적의 공격을 받자 연대는 23: 00경 야음을 이용하여 상원강을 도하 적의 진지가 있는 능선 하단부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10월 19일 제12연대는 여명을 기하여 포병과 전차의 엄호하에 돌격하였으나 적은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한 후였다. 동평양 못미쳐 오류리에 설치한 북한군의 3번째 평양 방어선을 돌파한 제12연대는 동평양의 선교리에 진출함으로써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한 부대가 되었으며, 제11연대는 문수리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제15연대는 대동강 상류에서 도강하여 모란봉과 김일성대학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한편 미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대동교까지 접근하는 순간 인민군에 의하여 대동교와 대동강 철교가 폭파되었다.


10월 20일 국군 제1사단은 이날 10: 00를 기하여 평양시를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국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가두를 메웠다


7. 초산전투

초산전투는 제7연대가 10월 26일 고장을 출발하여 초산으로 향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서 저항하던 북한군 연대규모의 병력을 2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격퇴시키고 초산으로 돌입하여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한 공격전투이다.


10월 25일 제7연대는 사단작전 명령에 따라 초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희천을 떠나 35㎞ 북쪽인 극성령 넘어 회목동에서 고장으로 향하던 중 저 항하는 인민군을 물리치고 18: 30에 고장에 도착하였으며,


10월 26일 07: 00 제7연대는 압록강을 향하여 진격하는 중, 초산 일대에 서 패잔병을 수습한 연대규모의 북한군과 초산 남쪽 6㎞ 지점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여 두시간의 교전끝에 초산을 점령하고 10월 26일 14: 15 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 국경선에 태극기를 꽂았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8.장진호전투

장진호 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이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하고 11월 16일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도달하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크리스마스 공세를 위하여 미 제1해병사단에게 서부전선의 제8군과 연결하도록 명령하자 무평리를 목표로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에서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쳐 치른 철수작전이다.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와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장진호 협곡 죽음의 통로를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유엔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하에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지대를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여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 전투로 미 해병대는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 중공군은 전사 2,500명, 부상 12,500명이나 되었으며,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되어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하였다.


9. 지평리전투

지평리 전투는 미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의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철수하므로 중공군에 포위되게 되었으나,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에 3개 대대 5,600명 병력을 마을을 중심으로 1.6킬로미터 전면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동안이나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지평리는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을 연결하는 중부전선의 교통요지로서 적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2월 13일 밤 중공군의 공격에 제23연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방어하였으나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프랑스의 몽클라대대는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어 백병전을 벌였으며,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예비중대까지 투입하고 병사들과 함께 수류탄과 총검으로 싸우면서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싸운 처절한 전투였다.


15일 크롬베즈의 제5기병연대가 적의 무차별 공격을 뚫고 지평리에 투입되어 사면초가 상태에서 악전고투하던 제23연대는 지원하므로써 중공군은 2,00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10. 현리전투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인제 남방 가로리에서 가리봉간을 방어중이던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 2개군과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하진부리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은 국군 제3군단 정면과 군단의 주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현리에서 분산된 채 산악지대를 따라 70㎞를 후퇴한 후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5월 16일 18: 00경 중공군은 국군 제7사단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7사단 전방의 2개 연대를 붕괴시킨 후 계속 진출하여 국군 3군단의 퇴로가 되는 오마치를 점령하였다. 5월 17일 07: 30경 중공군의 오마치 점령부대는 처음 1개 중대 규모였으나 계속 증강되어 야간에는 1개 사단규모로 확대되었다.


국군은 제3, 제9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여 21: 00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계급장을 떼고 무기를 버리는 등 국군 제3군단의 무질서한 후퇴로 적의 추격은 창촌-광원리-하진부리에 이르는 70㎞를 가서야 끝을 보게 되었다.


5월 20일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4%, 9사단이 40% 정도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계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과 주요 장비를 손실하였으며,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5월 26일부로 제3군단을 해체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에 이르는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11. 백마고지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으로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터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10월 6일 아침부터 국군 제9사단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던 적은 봉래호 뚝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중공군 제38군이 백마고지 일대로 공격하였으나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다음날 밤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은 2개 대대로 전초진지를 포위하면서 계속된 공격에 국군 제30연대가 철수하고 약 2시간후 제28연대가 역습하여 다시 탈환하였다.


10월 8일 새벽 짙은 안개속에 중공군의 공격으로 포병 및 항공지원을 받지 못한채 국군 제28연대가 사력을 다했으나 역부족으로 08:10 주봉을 빼앗기자, 사단은 17: 00 제28연대 제3대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장장 8시간의 격전끝에 23: 05 주봉을 탈환하였다.


9일밤 자정무렵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새벽 03: 00 적에게 주봉과 그 우측능선의 일부를 빼앗겼으나 항공폭격과 17,700발의 포탄을 집중 폭격하고 이 날밤 제29연대가 역습을 전개하여 자정 무렵 고지주봉을 탈환하였다.


10일 새벽 04:00경 적의 공격으로 피아간에 처절한 백병전 끝에 주봉에서 철수하였다가 역습하여 06:3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10월 11일 밤에 중공군에 빼앗기자 12일 아침 반격하여 재탈환하였으나 적의 반격으로 빼앗기고 빼앗는 밀고 밀리는 육탄전끝에 10월 15일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고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만 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아군도 3,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주출신 강승우 소위가 부하 2명과 함께 6.25전쟁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12. 유격대 활동

6·25전쟁에서 유격부대가 활발히 전개됐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점령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반공유격대는 1·4후퇴 이후에도 서해안·동해안 연안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계속됐다. 특히 동서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격대원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자 각지에서 치안대, 결사구국대 등의 무장대를 조직하여 북한군·내무서 등을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가까운 섬으로 탈출하여 공산세력으로부터 고향을 탈환하려는 반공정신이 강했지만 무기와 탄약 등 보급이 크게 부족하자 미군은 51년 1월 `에이블 계획'을 수립하여 무기·통신장비·보급 지원을 통해 민간인 유격대원들을 활용하였으며, 국군도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작전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명유격대대' `백골병단' `백봉부대' `육군 을지병단' 등을 운용했다.


유격대원들은 출신지역별로 편성돼 동질감, 지리, 말투, 행동이 같아 효과적인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지로 출동해 인민군과 중공군 진지습격, 지하조직 구축, 피난민과 조종사 구출, 무기 노획 등 여러 작전을 펼쳤으며, 군사시설이과 군대 이동상황과 규모 등 북한 지역에 대한 전투와 정보수집 활동을 하였다.


유격대의 대표적인 기지는 백령도의 `레퍼드'기지(3654명),와 주문진의 `커크랜드' 기지(290명)였다. 후에 강화도의 `울프 팩'기지(4389명)가 추가됐으며, 51년 7월 미 극동군사령부는 이들 유격대를 제8240부대로 통합하여 운용했다.



13. 다부동전투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서 빛을 잃는다.”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마산 진동리~왜관~영덕)의 승패를 좌우한 다부동 전투를 회고하면서 “다부동은 장병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과 학도병들의 피로 지켜 낸 곳”이라고 말했다.

남하하는 적을 맞아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었던 최후의 보루, 낙동강 전선, 1950년 8월초. 대구 북방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던 국군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장병들은 떠오르는 여명을 바라보며 조국 산하를 한 목숨 다 바쳐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그 시각, 다부동 축선에 위치한 적이 여름 가뭄으로 수심이 얕아진 낙동강을 도하하고 있었다.

국군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광범위한 방어선을 일부 조정, 정면을 축소한 뒤 새로운 방어선 점령을 위해 11연대는 상판동~석우동, 12연대는 유학산~수암산, 15연대는 328고지~270고지에서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날 국군1사단 보다 한발 앞선 적 15사단에 유학산을 내주고야 말았다. 유학산은 다부동의 맥이었다.

14일 대구 정면의 적이 총공격해 왔다.

김일성이 김천에서 내린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시한부 명령을 지키려는 듯 최후 발악으로 밀고 들어왔다.

대구 전선에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던 16일 유엔군사령부가 6·25전쟁 발발 이후 최초로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날 정오 무렵 30분 동안 B-29기 98대가 쏟아 부은 폭탄은 무려 960t에 이른다. 하지만 적의 공세는 여전했다. 오히려 적은 산주막에서 진목정쪽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최후의 일전을 걸어왔다.

이때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미27연대가 ‘소방대’(위급한 전선에 항시 투입돼 불을 끈다는 뜻의 부대 별명)로 다부동에 등장, 적 탱크 14대와 자주포 4대를 파괴하고 1300여명을 사살하며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12연대가 8차례에 걸쳐 공격한 끝에 21일 야간 기습을 통해 유학산 탈환에 성공했다. 적에게 통쾌한 패배를 안긴 국군 제1사단은 23일 마침내 적 2만4000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의 피로 얼룩진 다부동에 태극기를 휘날릴 수 있었다.

반세기가 흐른 다부동은 한없이 평온했다. 낙동강은 흘러 흘러 바다로 향했고 당시 이름없이 산화한 임들은 방탄 헬멧과 군번줄, 그리고 비문으로 전적기념관에 남아 있었다. 가파른 고개 곳곳에서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꽃같이 쓰러져 간 전사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육군 50사단 장병들은 6·25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다부동에서 작전을 실시하고 있는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써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필승의 전투 의지와 실전적 교육훈련으로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14. 해군 ‘옥계지구 전투’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산 395번지에는 1600여평의 잘 정돈된 공원 중앙에 기단 높이 3m, 비 높이 17m의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

6·25전쟁 초기 해군이 처음으로 용전분투한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해군 옥계지구 전적비가 그것.

전적비는 옥계지구 전투의 빛나는 무훈을 기리고 전후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기 위해 1990년 4월 세워졌다.

24일 오전 민족의 비극 6·25전쟁 발발 54주년을 맞아 해군1함대 장병들과 옥계지구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옥계지구 전투는 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이 38선에서 전면 남침한 바로 같은 시각에....”로 시작하는 비문 앞에 선 참전용사와 후배장병들은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먼저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위한 묵념을 올렸다.

옥계지구 전투는 50년 6월25일 새벽 4시 지상군의 대거 남침과 동시에 특수 게릴라 부대를 이용, 당시 강릉에 주둔 중이던 육군 8사단의 후방을 교란하고자 동해안 상륙을 시도한 북한군 상륙선단과의 교전.

새벽 3시30분쯤 동해안을 따라 남침을 기도한 북한 766게릴라 부대는 1800여 명의 병력을 1000t급 무장 수송선과 어뢰정(PT)4척의 엄호아래 발동선 30여 척에 나눠타고 옥계 등지의 해안으로 침투를 시도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묵호기지사령관 김두찬 중령은 즉시 해군본부에 보고하는 동시에 묵호항에 정박 중이던 소해함 YMS-509정(정장 김상도·소령)에 긴급 출동명령을 내렸다.

긴급 전문을 받고 묵호항을 출발한 YMS-509정은 묵호와 옥계 중간 해상에서 적 함정과 조우,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때 적 함정은 함포를 맞아 화력이 약해져 북상했고 함수에 포탄을 맞은 YMS-509정도 침수를 막기 휘해 묵호로 귀항했다.

당시 참전한 최성윤씨는 “20여 분간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며 “적함이 속도도 더 빨랐고 포도 더 컸지만 500야드까지 접근해 사격한 509정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고 말했다.

긴급 수리를 마친 509정은 오후 3시쯤 옥계 북방 3마일 지점에서 상륙중이던 북한군을 발견, 해안에 있던 북한군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해 묵호항으로 예인했다.

해군 사상 최초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이 전투를 통해 해군은 적의 작전 목적을 사전에 좌절시킴으로써 6·25전쟁 초기 아군의 전열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3인치 포를 장착한 전투함 백두산함(PC-701)등 전투 함정 28척과 병력 6950명(해병 포함)으로 함정 80척, 1만6200명의 북한 해군에 대항해 전쟁을 수행한 우리 해군.

옥계지구 진투는 후방을 교란시키려던 적 게릴라 병력 600여명을 태운 1000t급 함정을 백두산함이 대한해협에서 교전 끝에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과 더불어 우리 해군의 6·25전쟁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15. 공군 첫 출격 ‘강릉기지’

마치 화살과 같은 날렵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KF-5E 제공호가 지축을 올리는 폭음을 토해 내며 활주로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바다 저편으로 사라진다.

곧 이어 다른 전투기들이 활주로에 진입해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한편에서는 임무를 마친 전투기들이 부드럽계 활주로에 착륙하는 이곳은 동해안 영공방위의 최일선인 강릉 공군기지다.

6·25전쟁 당시 육군은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와 북진,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1·4후퇴 등의 주요 국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격전을 펼쳤다.

반면 드넓은 창공을 무대로 싸운 공군은 한반도 전체가 주요 전장이요 작전 무대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강릉기지는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 작전(1951년10월11일)과 100회 출격 조종사 39명이 배출되고 11명이 산화한 모든 공군 전투조종사들의 고향이자 공군의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다.

당시 공군 유일의 전투전력이었던 제10전투비행전대(현재의 공군10전투비행단)는 51년9월28일 강릉기지에 전개한 이후 53년3월24일까지 총7818회 출격하며 격전을 치렀다.

이 출격횟수는 공군의 총 작전 출격횟수(8495회)의 92%에 이르는 것이며 전체 유엔군 중 미공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것이어서 당시 강릉기지가 공군에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는지 입증하고 있다.

F-51D무스탕 전투기와 한몸이 된 공군 전투조종사들은 열악한 작전 환경에도 불구하고 애국심과 자부심만 갖고 사선을 넘나들며 고난도의 임무를 완수해 냈다.

미5공군이 수차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 실패했던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52년1월15일)을 한국 공군 단독으로 출격해 옥만호 대위·윤응렬 대위가 지휘하는 2개 편대 6대의 전투기로 성공시켰다.

미공군 하위 제대의 하나로 평가절하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한때 해체, 유엔 공군에 흡수될 뻔하기도 했던 한국 공군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직접 검증해 보인 것이다.

이후 송림제철소 폭파작전(52년3월28일)에서는 6일간 총116회 출격을 통해 북한의 주요산업 시설을 완전히 초토화했고 평양 대폭격작전(52년8월29일)에서도 미 공군 못지않은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비록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10전투비행전대는 비행단으로 승격돼 53년3월25일 수원 공군기지로 이동했지만 그 정신만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투조종사들 사이에 살아 숨쉬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쉴새없이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강릉 공군기지에서 작전에 임하고 있는 ‘빨간 마후라’의 후예들은 높은 자부심과 긍지를 바탕으로 오늘도 한 치의 빈틈없는 영공방위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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