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북한출신 의용군

똥맹돌이 2008. 1. 18. 10:36
 

북한 출신 의용군


1950.7.10. 북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피난민 중에서 청년 200여명이 제주 동부두 주정공장에 자진하여 모였다. 그들은 주정공장 중역으로 있는 황해도출신 손득정을 지휘관으로 추대하고 “지금 공산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는데 그들의 학정이 싫어 월남한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 없지 않은가, 만약 남한이 적화되는 날이면 우리는 갈데없이 다 죽는다. 죽을 각오로 나서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일치단결하여 총을 들자” 스스로 지원한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겨우 총 쏘는 법만 배우고 당시 광주에서 항전하고 있는 국군 제5사단에 편입하기로 작정하고 1진 50여명이 닷새 후인 50.7.15. 광주에 도착하여 선발대로 일선부대와 합류하였으며, 호남으로 침공한 공산군이 목포를 유린하고 있을 때, 50.7.25. 한재길 경감과 이름을 알수없는 해군 하사가 의용군 2진100명을 인솔하여, 무전시설까지 갖춘 화물선으로 목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영동지구에서 개전이래 최대의 격전이 벌어지고 신태영 소장이 이끄는 전북지구전투사령부와 이응준 소장이 이끄는 전남지구전투사령부가 임실, 남원, 광주, 순천을 거쳐 철수를 거듭한 끝에 마산에 상륙하기 이틀 전의 일이다.)


배가 진도 앞바다를 항진할 무렵 통신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큰일 났습니다. 목포에 이미 공산군이 들어왔다는 통신입니다.” 순간 배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왕 출동하였는데 되돌아갈 수는 없으므로 선수를 동쪽으로 돌려 고흥반도에 다음날 당도해보니 그곳에도 적이 진주해 있었다. 이에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각오아래 50.7.26일 아침 여수 앞을 통과하는데 육지에서 무장한 공산군들이 소련제 장총으로 배를 향해 사격을 가해왔으나 거리가 멀어 의용군이 타고 있는 배에는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해상기동력이 없어 쫓아오지 못하는 적병을 응시하며 다시 동쪽으로 항진을 계속한 끝에 거제근해 욕지도에 닿은 것이 그날 오후였다.


섬주위에는 수많은 피난선들이 갈 곳을 정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광주에 주둔하던 제5사단이 이 섬으로 철수하여 반격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철수한 병력가운데 앞서 떠난 의용군의 제1진이 풀죽은 얼굴로 반가히 맞아주었다.


욕지국민학교에서 2박3일을 머무는 동안 우연한 기회에 웅성거리는 피난민 대열 속에서 제5사단장 이형석 준장을 만났다. 의용군들은 반가움에 겨워 이 사단장을 애워쌌다.

“우리는 스스로 의용군을 편성, 일선에서 싸우기로 자원 출정했습니다. 현역병과 똑같이 부대에 편입시켜 주십시오” 강경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 준장은 이쪽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패기만만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는 사정과 인도를 먼저 내세우며 “나는 패군지장이오 육군본부에 여러분을 편입시킨데 대해 보고할 면목이 없소, 더구나 우리에게는 군복도 군량도 무기도 없소, 여러분의 뜻은 가상하오만 다음을 도모합시다.”


사복으로 떠났던 이들에게 군량도 무기도 없다면 구야말로 오합지졸외에 무슨 구실을 하랴. 눈물을 머금은 퇴진이었다. 타고 갔던 화물선에 일행이 다시 승선하여 제주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들은 지금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참고자료 : 실록 제주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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