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의 영웅 강승우소위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성로 46(탐라자유회관 마당)
백마고지의 영웅 강승우 소위의 고향 제주시 삼성로 46(일도이동) 탐라자유회관 마당에는 ‘백마고지의 영웅 강승수소위상’이 서 있다. 10m 높이의 기념탑 앞에 만들어진 3용사 동상은 3m 높이로 1991년 제작됐다. 동상은 60년 전 총과 포탄을 들고 중공군의 중기관총 진지를 향하여 땅을 박차고 나가던 백마고지 3용사의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했다. 이들 백마고지 3용사 동상은 아직도 북녘을 향하여 돌격하고 있다. 그리고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 오조로 55 동남초등학교에는 동남초등학교 출신 강승우 소위의 ‘호국영웅 강승우상’이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중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였다. 백마고지는 수많은 포격전으로 벌거숭이가 된 모습이 마치 백마 같다하여 백마고지로 불렸다.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395m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고지. 그러나 이 고지를 차지하는 주인은 철원평야와 철원, 평강, 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를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동안 국군 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은 무려 24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그 결과 24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양측 사상자는 무려 2만여 명 양측에서 사용된 포탄 수만 무려 27만5천여 발, 포격전, 수류탄전, 육박전 등이 망라된 백마고지 전투는 세계전사상 유례가 없는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 승리의 수훈을 세웠던 9사단은 백마부대가 되었다.
당시 강승우 소위를 포함한 3용사의 육탄돌격은 백마고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휴전이 되었을 때 철원일대가 남한 쪽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가 밑바탕이 되었고,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에는 강승우 소위가 있었던 것이다. 강승우 소위는 1951년 6월 부산 동래의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해 6개월간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강승우 소위가 전사했을 때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안보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신성인의 결실이며, 고귀한 젊은 피의 댓가다.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안보현장을 둘러보고 애국심과 호국정신을 기려야 할 것이다.
趣旨文
우리 濟州道가 낳은 康承宇少尉는 安永權下士 吳奎鳳下士와 더불어 六·二五韓國戰亂當時 가장 熾烈하였던 白馬高地 戰鬪를 勝利로 이끌었던 肉彈三勇士의 한사람이자 그 指揮者였던 것이다. 康承宇少尉는 一九三0년十一月二十三日 秀麗한 城山峰이 바라다 보이는 마을 始興里의 農家에서 태어났다. 少年康承宇는 心性이 착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일찍부터 地域社會를 위한 靑少年運動을 일으켰던 것이니 이는 後日의 農漁村開發運動의 先驅者가 되었던 것이다. 六·二五戰亂으로 祖國의 運命이 百尺竿頭의 危機에 놓여있음을 깨달은 그는 自願入隊하여 救國의 戰列로 떨쳐 나섰던 것이니 一九五一年十二月 陸軍 少尉로 任官되면서 九師團三十聯隊 一大隊一中隊의 小隊長으로 配屬되었고 一九五二年十月十二日 午前八時 中共軍二개 師團과 對峙하였을때 韓國戰亂의 戰勢를 크게 가름하였던 白馬高地奪還作戰에서 뒤를 따라나선 安永權下士 吳奎鳳下士와 더불어 肉彈으로 血路를 開拓함으로써 白馬高地奪還의 神話를 創造해 냈던 것이다. 白馬高地의 英雄 康承宇少尉의 高貴한 殉國은 우리濟州人의 氣槪의 象徵인 동시에 길이 빛날 爲國忠節과 護國精神의 龜鑑이 될 것이다.
玄谷 梁重海 글을 짓고 謹薺 金順謙 쓰다.
(취지문 뒤)
書記 一九九一年 七月 十五日
故康承宇少尉追慕記念事業推進委員會
委員長 張正彦外 一六四名建立
'제주의 순국.호국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국지사 문덕홍 (0) | 2017.03.05 |
---|---|
강승우 소위 이야기-1954년 도의 교육독본(초등),국방부 만화 (0) | 2016.07.04 |
백마고지전투와 영웅 강승우 중위 (0) | 2014.10.15 |
모충사 탐방 :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0) | 2014.08.18 |
호국영웅 고태문대위 (0) | 2010.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