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육군 제1훈련소와 중공군포로

똥맹돌이 2013. 6. 28. 17:34

육군 제1훈련소와 중공군 포로

 1950년대 초반 제1훈련소에서 훈련소장이 훈련병들로부터 종합 사열을 받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은 1950년 7월16일 제주도에 육군 제5훈련소를 긴급히 설치했으며, 전황이 불리해지자 대구에서 창설되었던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22일에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되었다. 그리고 국방부 제2조병창, 무선통신중계소 등이 설치됐고, 제주와 모슬포 등 2개소에 중공군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등 많은 군사시설이 제주도에 설치, 운용되었다.

1950년 12월부터는 피난민들이 제주도로 대거 몰려들었다. 정부는 1951년 1월12일의 국무회의에서 피난민 42,000명을 제주도로 집단 이송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도 하였다. 피난민 수는 1951년 1월3일에 16,000여명이던 것이 1월15일 87,000여명, 5월20일에는 148,794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선이 안정되자 피난민 일부가 고향으로 복귀하였지만 1952년 1월말에도 북제주군에 22,000여명, 남제주군에 6,500여명 등 제주도에 28,460여명의 피난민이 남아있었다.

육군 제1훈련소는 한때는 8개 신병연대와 2개 교도연대 및 1개 하사관학교와 수송학교, 1개 육군병원 등을 거느린 제주도에서는 최대부대로서, 1954년 8월에 폐쇄될 때까지 3년 반 동안 많은 신병을 양성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포로들을 처음에는 부산에 수용하고 있다가 반격작전과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의 변동이 심해지면서 포로가 대량으로 발생하자 거제도에 대규모의 포로수용소를 설치, 관리하였다. 포로숫자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포함하여 최대 166,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간에 학살과 잔학행위가 수시로 발생하고, 심지어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6월부터 포로들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분리하여 분산수용하였다.

북한군포로는 거제도와 육지에, 중공군포로는 제주도에 수용하였다. 중공군 포로는 본국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는 제주비행장에, 송환을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는 모슬포 비행장에 수용하였는데 1953년 2월1일의 포로수용인원은 제주비행장의 포로가 5,809명, 모슬포의 포로가 14,314명이었다. 제주비행장에 수용된 친공포로는 1952년 10월1일 중공 정부 수립 3주년을 맞이하여 행사를 한 후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이에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던 미군 2개소대가 시위하는 포로들을 진압하였는데 이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살되고 113명이 부상하였다.

 

한편,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사령관은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9월1일에는 해병대가 전선에 투입되므로서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1950년 7월13일에 제1대대를 군산으로 이동시켜 호남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저지에 투입하였고, 잔여부대는 9월 초에 부산으로 이동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제주도 청년을 대거 입대시켰는데, 8월 27일에 3기생 1,500명과 8월30일에 4기생 1,500명 등 3,000명이었다. 전쟁 초기에 해병대에 입대한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는 4.3을 겪으면서 남로당의 행패에 진저리를 치던 우익청년들은 물론 토벌대에 쫒겨 한라산 동굴에 숨어 있던 도피자들은 모병소식을 듣고는 지옥같은 제주도를 빠져나가거나 빨갱이 누명을 벗을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너도나도 자원입대하였으며, 입대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용맹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4.3사건의 진상 나종삼 편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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