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 모습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 5개 중대병력이 제주도로 이동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육군 1개 대대 병력만 주둔하고 있었는데 병력교대나 물자수송, 환자이동 등을 해군선박에 의존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경남 진주 해병대와 제주도의 육군 임무를 교대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1,200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해병대는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만 제주읍에 두고 제1대대와 제2대대 2개 대대로 편성해 모슬포에 주둔시켰다. 1대대(대대장 김병호 대위)는 1,2중대로 편성하고 2대대(대대장 고길훈 소령)는 5,6,7중대로 편성하여 1950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무장대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옛 해병대 주둔터 일도1동 1476-61번지(현 조일약국) 일대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 있던 해병대는 진행중이던 무장대 진압작전을 중지하고, 일단 해안선 경비를 더욱 엄중히 하였다. 7월 8일에 비상계엄이 선포됨에 따라 해병대는 치안을 확보하고 해안감시 및 해상경비에 철저를 기함과 동시에 제주도에 상륙하는 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상에 출현하는 적을 발견하는 즉시 포착, 섬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해병대 대령 신현준을 사령관으로 한 제주지구계엄사령부가 제주도청(관덕정 소재)에 설치되었으며, 해군경비부, 해군병원 설치된다.
해병대는 8월 제주 출신 학생으로 구성된 해병 3기.4기(여학생 126명 포함) 3,000명(1개 연대)을 제주농고와 모슬포에서 단기 훈련시킨 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해병3기생은 회사원과 교사, 일반 청년이 주를 이뤘고, 해병4기생은 학도호국단 출신이 많았고 제농, 오현중, 서귀중, 한림중 등 학생이 대거 자원입대하였다.
해병4기 입소식(제주북국민학교)
당시 한국해병대의 부대구조와 병력 숫자상 제주 해병대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당시 해병대 총인원 6,000여명 중 3,000여명(6.25전쟁 발발직전 제주도 해병대 병력 1,241명) 이 제주 해병대원들이었고, 또한 그 당시 3개 대대와 김성은 부대 및 수색중대가 있었으나 김성은 부대는 진주 방어 후 마산, 진해로 이동 통영지구 전투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제주 해병대원 3,000명이 3개 대대에 집중 배치되었으므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제주도의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해병대에 대거 지원한데는 4.3사건을 겪으면서 학생과 젊은 청년들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순수한 애국충정에서 나왔으며 당시 제주도에 주둔한 해병대가 민심수습, 치안확보 등 도민들의 생활안정에 심혈을 기울여 두터운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해병대 모슬포부대 1대대는 1950년 7월 13일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에 처음 투입되었다. 그리고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8월 17일 7척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통영상륙작전에 참전하여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9월 20일 한강을 도하하여 수색방향으로 진격한 뒤 최후방어선인 104고지 전투, 연희고지 전투에서 적을 격퇴한 후, 수도 탈환전투에서 제주 해병대원들은 주력이 되어 해병대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면서 9월 27일 06시10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후 10월 7일에는 인천항을 출항하여 묵호, 원산에 상륙하여 고성, 원산, 함흥지구 전투를 수행하게 되는데 그중 해병대 2대대는 10월 19일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일대에 준동하는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다 11월 30일 원산지역에 상륙하여 북진작전을 전개였고 해병 제3대대에 이어 제5대대 제1대대 순으로 10월 27일 묵호, 원산 및 고성에 상륙하여 북진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후 해병대 제1대대와 3대대는 마전리, 간성지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눈보라 속에 철수한 뒤 원산방어에 임하다가 제3대대는 12월 7일 부산으로 철수하고, 제2대대와 5대대는 함흥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다가 12월 15일 연포비행장에서 철수하여 진해에 집결하였다.
1.4후퇴이후 반격작전을 하게되면서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1951년 1월 24일 안동에 도착하여 안동-대구간의 도로확보와 적 수색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으며, 해병대 제1대대는 1월 26일 진해에서 출항하여 영덕 하저동에 상륙한 뒤 적 패잔병 약 300명을 소탕하였다. 그리고 해병 제1연대는 2월 15일 묵호에 상륙한 뒤 육군 제3군단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2월 19일 영월지구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3월 19일에는 홍천지구에서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되어 가리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4월 16일에 해병대 제1연대 2대대는 화천지구 전투에, 6월 4일에 해병대 제1연대가 도솔산 전투에, 8월21일에 미 해병대 1사단과 함께 펀치볼 전투에 참여하였다. 특히 김일성고지(924) 및 모택동고지(1026)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4일 동안의 혈전 끝에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2년 3월 17일에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투입되어 1953년 7월 휴전까지 장단지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장단지구 전투는 휴전이 될 때까지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기지로서 중공군 2개 사단과 대결한 방어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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