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제일학도의용군

똥맹돌이 2006. 2. 23. 16:02
 

제일학도의용군

 

 

가. 의용군지원

641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이 6.25전쟁에 참여하여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정, 백마고지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재일학도의용군 중에는 제주도출신 19명이 포함되어있다.

공산군의 남침소식과 수도서울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재일동포 청년 및 학생들은 즉각 “우리의 힘을 다하여 공산침략자들을 쳐부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본부는 김재화 단장을 중심으로 27일과 30일에 걸쳐서 대규모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민단이 취해야할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조국수호를 자원한 지원병들을 조국전선에 파견한다고 의결하고. 중앙본부내에 지원병지도본부를 설치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지도본부는 즉각 취지문, 격문 등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한목숨 바쳐서라도 내조국은 내가 지키겠다는 피 끓는충정으로 의용군에 자원한 이들이 1,000여명에 달하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이들은 17세부터 42세에 이르렀으며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중 신체검사 등 소정의 검사를 거쳐 의용군으로 확정된 인원은 653명이었고, 이중 학생은 130여명, 520여명은 애국청년들이었다. 당초 청년학도들의 전쟁참전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주일대표부 및 유엔군총사령부에서 몇차례 거절하였지만, 재일동포 청년학도들의 끈질긴 요구와 숭고한 조국애에 고무되었고, 위급한 조국의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어 참전이 성사되었다.

해방이후 북괴의 앞잡이 조청련과 반공투쟁을 벌여오던 재일거류민단 산하의 청년 및 학생들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부터 일본 동경, 대판, 구주 등에서 재일한국인 학생 청년들이 의용군을 조직하고 극동지구 유엔사령관 맥아더에게 조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여 줄 것을 건의하여 참전하게 되었다.

 

나. 인천상륙작전참가

의용군들은 동경에 주둔한 미 제1기갑사단과 미 제3사단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1진 280명이 유엔군에 편입되어 1950.9. 15.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으며, 2진은 9.28 서울탈환작전에, 3진은 9.27일 경기도 이천에서 미 제7사단에 편입되어 원산상륙작전 등에 참가한 후 풍산을 거쳐 갑산.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용맹을 떨쳤는데, 중공군과 북괴군 사이에 일본군이 참전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활약이 대단하였다.

한편 인천에 상륙한 후 후방지원부대에 배속되었던 의용군들이 독립된 부대로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삼일독립대대’를 50.10.31.편성하고 미군중위 지미 S 고자와의 지휘로 훈련을 받던 중 미군사령부의 지시로 해산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0.11.12. 제4진이 원산에 상륙한 후 장호진 전투에 참가하고 제5진은 일본에 주둔중인 미 제3사단에 편입되어 50.11.14.부산에 상륙한 후 국군 제2훈련소에 입소하여 신병교육을 받고 국군 제9사단에 편입되었다.

1950.12. 의용군 200여명이 국군에 편입되었으며, 그중 30명은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초급장교의 교육을 받고 일선에 배치되었다.

전선에 참가하여 맹위를 떨친 재일학도의용군은 1951년을 고비로 일부 미군부대가 작전상 일본으로 이동하게 되자 268명이 미8군의 주선에 따라 일본으로 귀환하였으나 그들 중 58명은 다시 육군 제2훈련소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고 하사관으로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갑종간부후보에 선발된 30명은 육군종합학교 제22기로서 입교, 장교교육을 받았으며, 1951년 3월10일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들은 이후 국군제3사단 제9사단 제1사단등에 전속명령을 받고 각 부대에서 전투소대장으로서 휴전이 되기전까지 벌어진 여러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의용군 중에는 일본군조종사 출신이 있어서 이들은 육군항공조종장교로 임관하였다.

 

2002년 7월의 호국인물 박두원 대위

6.25전쟁 때 자원입대해 89회 출격하고 전사한 공군 조종사 박두원(1926~ 1952)대위가 ‘2002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한 박 대위는 1950년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 지상전투에 참가하던 중 공군 전투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종사로 지원했다.

그는 이후 F-51 무스탕전폭기의 조종간을 잡고 원산,고성,신안주 등의 적 진지 공격과 보급로차단 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1952년 8월 2일 89회 출격 때 내금강 장안사 지역의 적 진지를 공격하다 대공포화를 맞아 숨졌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대위로 특진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참전자 현황

참전자 현황 : 총 참전인원 : 641명

...................일본 귀환자 : 271명

...................본국 잔류자 : 226명

...................전사.실종자 : 144명 - 전사자 61명 (52명은 국립묘지 안장 /

..................................................9명은 일본 大行寺 봉안), 실종자 83명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제주출신 19명 중에서 제주시 회천동 출신 李基洪 1명이 전사하고 11명이 일본으로 귀환하였으며 4명은 전후에 사망하고 양옥룡(안덕 화순출신) 등 3명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일본. 의용군 귀환 거부

전쟁이 끝나고 재일학도의용군중 유엔군부대에 편성되었던 대원들은 미8군사령부주선으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1952년 5월 美 日간에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일본정부가 조약체결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국하였던 재일학도의용군들에 대한 일본재입국을 허용치 않음으로 인하여 국군에 편입되었던 재일학도의용군 226명은 일본귀일이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국내에 마땅한 생활거처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겪은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본국에 잔류하게된 이들은 할 수 없이 생계유지를 위한 자립대책을 강구하면서도, 일선장병 위문 재일연예인 초청공연, 조총련의 재일동포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공작활동을 전개하는 등 반공일선에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1965.9.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가 설립되고 1962년1월 대통령으로부터 전회원에게 武功防衛表章(무공방위표장)이 수여되었다.

군사원호보상법에 재일동포학도의용군도 당연히 포함되었으며, 1968년에는 국회가 대한국가유공자 등 특별원호법을 제정하여 일본에 귀환치 못한 의용군들에게 정착수당(1인 50만원)을 지급하였고(법률 제2071호), 이를 시발로 1980년대 들어서 1984.8.4일 제정된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 범주에 넣어 예우하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은 재일동포사회의 애국심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재일동포사회의 자랑이요, 애국정신의 귀감인 것이다. 하지만 참전용사의 일본귀환조차 완료되지 못한 것을 비롯, 사후의 보상이나 현창도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이후 민단과 당사자들의 노력에 의해, 그리고 정부의 배려속에 1962년 전사자들을 국립묘지에 안장(11번묘역)하였으며, 전후 사망한 학도의용군들을 위해 천안에 있는 망향의동산에 재일학도의용군 묘역을 확보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1979.10.1. 인천시 남구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또한 1989년 9월21일에는 민단중앙본부회관 정면에 재일청년학도의용군 한국동란참전기념비를 건립하여, 참전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명기하여, 재일동포사회의 자랑스런 정신적유산을 대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한국동란참전기념비

.....* 비문내용

.....동방에 거룩한 터전을 열고

.....유구한 역사의 명맥을 이어온 배달겨레,

.....슬기론 후예들 혈관 속에

.....조상의 전통 배어들어 바다밖에 나가 살아도

.....내 나라 향한 불타는 사랑

.....그 사랑만은 잊지 못하고

.....북한의 공산당들 이리떼같이 몰려 내려와

.....국토와 겨레를 짓밟을 적에

.....젊은 학도들 현해탄 건너

.....사자보다도 용감히 싸웠네.

.....의기와 정열의 사나이들

.....그 정신 역사에 새겨 민족행진에 횃불이 되고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려

.....청춘을 낙화처럼 바친이들,

.....겨레의 가슴마다 열매맺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리라.


한국동란참전사

* 민단중앙본부회관 정면에 세워진 재일청년학도의용군 한국동란참전기념비 비문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의 불범남침으로 인하여 조국의 흥망성쇠가 백척간두에 놓여 있을 때, 재일동포 청년학도들은 북괴의 만행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조국과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전역에서 학업과 생업을 버리고 자진하여 의용군으로 모여든 641명은 용약, 미국 맥아더장군 휘하의 국련(UN)군에 입대하여 동년 9월15일 국련군과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어-허 장하도다 9월15일 청년학도들!

우리 의용군은 수도서울 탈환작전을 비롯한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북진작전에 참전하여, 북한 전역의 치열한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전사자 61명, 행방불명자83명 계144명이 거룩한 생명을 조국에 바쳤도다.

전 재일한국인은 젊은이들의 참다운 애국충정으로 백의민족사를 빛나게 한 영광된 표상인 그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이에 비를 세워 자유와 정의,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행진의 나침반으로 삼는다.

1989년 9월15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본부 단장 박병헌

참전자명부

姜之龍, 姜元兒, 姜化龍, 姜永龍, 姜信洪, 姜三濟, 姜在明, 姜文休, 姜一龍,

姜泳錫, 姜大국, 姜孔來, 姜大允, 姜大龍, 姜乃石, 姜珍植, 姜椿植, 姜亥石,

姜秀俊, 姜渭洙 康麗春, 康俊明, 康在伍, 康喜洙, 高熙穆, 高玉鎭, 孔泰瑢,

孔亨根, 郭漢永, 郭東儀, 郭道容, 郭皇永 郭石龍, 郭海勉, 郭正佶, 具載會,

具一榮, 權良弼, 權順謙, 權東國, 權鍾培, 權昌煥, 金岡雲, 金權文 金圭相,

金環植, 金他官, 金泳鎭, 金文榮, 金容鐵, 金拓錫, 金圭奉, 金東信, 金富仁,

金敬德, 金相扶, 金炳國, 金鎭洙, 金星煥, 金景元, 金約西, 金慶夫, 金泰元,

金基範,, 金都閏, 金容善, 金政柱, 金德煥, 金潤植, 金鍾閏, 金聯鎬, 金炳錄,

金具烈, 金禎圭, 金基守, 金基鎭, 金尙權, 金東淳, 金相成, 金喆澔, 金判德,

金鎭成, 金龍泰, 金泰守, 金貞植, 金忠一, 金鎭睦, 金泰善, 金泳水, 金東賢,

金德培, 金錫基, 金尙壽, 金雙秀, 金周年, 金子元, 金太鳳, 金性龍, 金東圭,

金釜根, 金淸奎, 金斗元, 金炳九, 金揚錫, 金學鳳, 金始啓, 金弼炯, 金聖郁,

金鐘杰, 金鳳瑞, 金德甫, 金作之, 金炳翼, 金世昌, 金正行, 金福涉, 金在河,

金載生, 金春培, 金性模, 金運太, 金義卿, 金光植, 金氣出, 金永鎭, 金東民,

金三永, 金甲度, 金聖務, 金敎仁, 金福乭, 金洛善, 金完基, 金秉池, 金容出,

金泰閏, 金永銀, 金顯英, 金秉鎬, 金 晸, 金炳南, 金永洙, 金基俊, 金昌洙,

金淇根, 金在錫, 金在源, 金炯權, 金鐘萬, 金鐘漢, 金震洙, 金桂淳, 金在東,

金思成, 金祥鶴, 金斗光, 金珍和, 金容坤, 金泰鎭, 金轍植, 金相鳳, 金東洙,

金鳳順, 金貴守 金東植, 金在鎭, 金享萬, 金永玉, 金昌九, 金相澤, 金禹俊,

金守培, 金道淳, 金德守, 金岩伊, 金炳基,金學仲, 金聯洪, 金光來, 金順龍,

金君福, 金正斗, 金仁斌, 金善洙, 金英秀, 金允玉, 金富飼, 金完玄, 金泰仁,

金章玉, 金鳳相, 金在鳳, 金金泰, 金永植, 南昌泰, 南龍伊, 南庭喜, 南知鉉,

盧洙龍, 盧炳烈, 盧皇羽, 盧介東, 都鎭春, 都相在, 都基讚, 羅日相, 羅侄鳳,

明德一, 文太舜, 文貞碩, 文性煥, 文萬福, 文浩均, 文英樹, 朴孝在, 朴相文,

朴龍出, 朴相福, 朴在鳳, 朴明煥, 朴蓮植, 朴性夫, 朴洙吉, 朴奇夏, 朴命學,

朴萬洙, 朴忠夏, 朴君七, 朴鐘燮, 朴載海, 朴正守, 朴大元, 朴命仁, 朴福伊,

朴基安, 朴元相, 朴道學, 朴東根, 朴炳憲, 朴讚植, 朴鳳珉, 朴秀榮, 朴英勳,

朴永哲, 朴珍雨, 朴錫泰, 朴晴男, 朴德根, 朴鐘昊, 朴鳳達, 朴海烈, 朴聯洙,

朴運旭, 朴貴鎭, 朴德喆, 朴斗煥, 朴在夏, 朴鐘秀, 朴鐘熙, 朴年圭, 朴景洙,

朴龍吉, 朴大闢, 朴柱萬, 朴完烈, 朴榮士, 朴在浩, 朴太鉉, 朴龍文, 朴龍泰,

朴魯植, 朴斗元, 朴正文, 方永旭, 裵英洙, 裵光道, 裵七星, 裵基治, 裵命睦,

裵守萬, 裵命順, 裵命嚴, 裵大圭, 白琦榮, 白南雲, 白玉根, 白漢洙, 白聯吉,

白南彪, 白享閏, 白英根, 卞在本, 史成煥, 徐點碩, 徐奎錫, 徐相源, 徐秉坤,

徐聖錫, 徐廷穆, 徐秉坤, 徐永浩, 徐在福, 徐崎淳, 薛然浩, 薛仁昊, 成在淑,

孫判用, 孫日出,孫尙洪, 孫讚淳, 孫相達, 孫鎬俊, 宋壹佃, 宋鎭浩, 宋二澤,

宋 阜, 宋義在, 宋斗景, 宋榮碩, 宋東源, 宋宰玉, 宋任出, 申東元, 申炳和,

申寅燮, 申祥鳳, 申孝甲, 申道光, 申珖淳, 申鉉甲, 申殷得, 申鐵用, 申信守,

申正熙, 申聖伯, 申 堅, 辛啓善, 辛命介, 辛永日, 辛榮玉, 辛孝銀, 辛任出,

沈佑澤, 沈承赫, 沈載元, 安相鳳, 安文官, 安壽商, 安洸淳, 安仁哲, 安成玟,

安基伯, 梁承德, 梁道承, 梁玉龍, 楊有乭, 楊泰銀, 嚴康永, 延圭玉, 吳啓錄,

吳世元, 吳炳允, 吳萬東, 吳寅成, 吳東洙, 龍漢文, 玉正男, 魏在達, 魏弘烈,

禹祗植, 禹仁基, 劉東安, 劉善福, 劉燦鎬, 劉三雄, 柳鳳相, 柳允玉, 柳再萬,

柳升鎬, 柳漢正, 柳聖喆, 柳光植, 兪鎭好, 兪昌和, 兪信吾, 尹錫淵, 尹延漢,

尹良童, 尹章源, 尹英吉, 尹錫河, 尹鶴鉉, 尹鎬泰, 尹龍根, 尹起泰, 尹命根,

尹錫浩, 李相烈, 李鍾祿, 李活男, 李得龍. 李在銀, 李鐘範, 李春生, 李泰洙,

李康俊, 李準馥, 李義道, 李漢逸, 李玟熙, 李起五, 李圭達, 李鍾林, 李東圭,

李昌鎭, 李瀅鐘, 李皓一, 李光洛, 李錫鏞, 李末學, 李奉男, 李柱萬, 李鎭雨,

李基庠, 李凡載, 李根生, 李宗植, 李鶴九, 李相鳳, 李勳圭, 李鳳洙, 李昌萬,

李明奎, 李成根, 李伊泳, 李道河, 李吉文, 李甲洙, 李源吉, 李根世,李 吉,

李聯周, 李秀一, 李鐘俊, 李榮植, 李康浩, 李哲在, 李商福, 李鍾舜, 李明奎,

李金龍, 李相壹, 李麟基, 李鐘洙, 李壽德, 李昇九, 李明根, 李道述, 李白洛,

李鐘弼, 李聖根, 李正善, 李洪雨, 李哲雨, 李東鎭, 李基洪, 李正萬, 李相鎭,

李義求, 李東國, 李鐘浩, 李完功, 李在道, 李宰天, 李龍洪, 李鳳壽, 李榮根,

李利道, 李千善, 李相根, 李良毛, 李基秀, 李仙基, 林奇順, 林鐘安, 林永贊,

林震澤, 林晟燮, 林長淵, 林斗洪, 張正夫, 張基成, 張萬福, 張東哲, 張德俊,

張師學, 張軫銖, 張胃錫, 張乃俊, 張三達, 張昌浩, 張童東, 張玉基, 張達奉,

蔣經燮, 田鳳樂, 全永萬, 全日南, 全泰仁, 全漢德, 丁鶴秀, 丁今準, 丁敬天,

鄭泰熙, 鄭泰進, 鄭相玉, 鄭 顯, 鄭南龍, 鄭俊鎬, 鄭海鵬, 鄭國?, 鄭棋聯,

鄭貴成, 鄭永達, 鄭明煥, 鄭 和, 鄭埈汶, 鄭完朝, 鄭忠模, 鄭鳳洙, 鄭又植,

鄭永根, 鄭準和, 鄭貞允, 鄭昌圭, 鄭享根, 鄭貴煥, 鄭仁述, 鄭達文, 鄭守治,

鄭海堂, 鄭石守, 鄭朱和, 諸宗漠, 趙沚洙, 趙承培, 趙基南, 趙道守, 趙鏞甲,

趙英振, 趙滿鐵, 趙圭燮, 趙權衡, 趙尙奎, 趙龍世, 趙仁石, 趙基玉, 趙命錫,

趙炳淳, 趙彙聖, 曺宗圭, 曺達承, 曺圭俊, 曺幸棋, 秦在植, 周九錫, 周洙會,

池碩鎭, 池潤沓, 池任鐘, 陳貴春, 陳點植,車龍文, 車富根, 蔡昌洙, 晋承運,

千昭三, 千德均, 千明龍, 崔在童, 崔碩樹, 崔東萬, 崔德淳, 崔光善, 崔成奎,

崔鐘華, 崔燁昭, 崔 榮, 崔春吉, 崔秉一, 崔翔吾, 崔泳泰, 崔相休, 崔德浩,

崔用守, 崔成源, 崔仁俊, 崔成出, 崔泳俊, 崔松淳, 崔容奎, 崔華春, 崔順洪,

崔海夢, 崔養鎭, 崔用德, 崔丙宗, 崔吉雄, 河在壽, 韓潤均, 韓東日, 韓相基,

韓先同, 韓享龍, 韓昌圭, 韓炳鎔, 韓鐘浩, 韓炳奎, 韓熙孝, 韓東春, 韓昌雲, 韓英敎, 許明?, 許淳哲, 洪敬鶴, 洪正官, 洪淳景, 洪起成, 洪景學, 洪俊彦, 洪朝鶴, 黃舜億 黃聖煥, 黃圭軒, 黃一根, 黃貞在, 黃鳳祚, 黃平吉, 黃崎信, 黃泰龍, 黃淳彦

참고자료 : 실록 제주백년. 재일본민단홈페이지

 

제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

 

동방에 거룩한 터전을 열고 유구한 역사의 명맥을 이어온 배달겨레

슬기론 후예들 혈관 속에 조상의 전통 배어들어 바다밖에 나가 살아도 내 나라 향한 불타는 사랑

그 사랑만은 잊지 못하고 북한의 공산당들 이리떼 같이 몰려 내려와 국토와 겨레를 짓밟을 적에 젊은 학도들 현해탄 건너 사자보다도 용감히 싸웠었네.

자유 평화 정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에 물 불속에라도 달려들었네.

의기와 정열의 사나이들

그 정신 역사에 새겨 민족 행진에 횃불이 되고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려 청춘을 낙화처럼 바친이들.

겨레의 가슴마다 열매맺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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