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자료

북방한계선

똥맹돌이 2007. 11. 29. 09:01
 

한강 하구로부터 우도-연평도-대청도-소청도-백령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 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의 중간선(북위 37˚35´과 38˚03´)이다.


38도선 이남에 있는 북한 관할하의 섬

해주만에는 용매도·대수압도·소수압도·무도 등 4개 도서

옹진반도 연안에는 순위도·용호도·어화도·창린도·기린도·마합도 등 6개 도서


한국전쟁 중 해주만 4개섬은 울팩부대(Wolfpack=이리떼)가 실효적 장악 주둔

            옹진반도 6개섬은 동키부대(Donkey=당나귀, 반공유격대·8240부대)가 상주 반공게릴라전을 전개한 요충기지. 8,000명

            * 황해도 젊은이들이 자생적으로 무장대를 조직하고 태극기와 유엔 기치아래 빨치산 기지로 활용


38도선 이북에 있었던 반공 빨치산 기지

대동만의 월내도와 육도, 장산곶 너머 초도·석도·웅도·청양도·상취라도·하취라도·운무도·대화도 등 동키유격대가 장악, 초도와 석도만 한국군 해병대가 주둔 

* 동키유격대를 총괄 지휘하는 표작전기지사령부가 백령도에 있었음(사령관과 참모는 미군)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은 서해안 일대 20개 도서들을 반공유격대가 장악하였으므로 2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후방 해안방어부대로 배치해야 했음.



      백령면 진촌2리 1184번지의 앞동산에 세워져 있는 '반공 유격 전적비'

[건립 개요] 1950년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 당시 이 곳으로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여 왔으며, 1951년 2월 28일 유엔군 관할 하에 8000여 명이 반공 유격대(8240부대: 동키부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과 백령도 수호에 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 전공을 기리고 장렬히 산화한 516명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와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협조를 받아 이 비를 건립함.

[전과]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 수행, 북괴군 57명 생포, 적 사살 4000명.

애국 청년들의 얼을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한국일보사 사장 장기영씨가 반공유적전적비 건립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소청도의 대리석으로 건립하였다.


백령도를 거점으로 적지인 북한 땅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인민군의 작전 교란과 미처 피난을 못하고 숨어 있던 애국 청년들의 구출 등으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군번 없는 반공 청년들의 얼을 길이 전하고저 하는 뜻에서 1961년 8월 15일 이 자리에 건립하였다.

전면 : 反共遊擊戰跡碑 大統領 尹普善. 후면 : 1961년 韓國日報社 建立.




동키부대는 (중략) 미군이 지급한 '앵글로 9' 무전기의 모양이 당나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동키부대의 활동영역은 압록강 하구의 대화도(大和島)에서 한강 하구의 강화도에 이르는 서해 30여개 도서 전체와 구월산, 멸악산 등 황해도 내륙까지 뻗치는 등 북부 서해안 전역을 담당했다.


1951년 10월 군사정전위에서 북한은 옹진반도를 포기할 테니 철원을 내주고 삼팔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미국 측은 방위의 어려움을 들어 거부한다.(중략)


1952년 1월 북한이 황해도와 서해 지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자 미국이 이에 반대하며 군사분계선 설정을 거부한다. 이는 동키부대의 전과 덕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키부대는 한국군의 정규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 후에도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최근까지도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이들의 전과나 존재는 입소문을 통해서는 알려졌지만 미 국방성의 기밀 문서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이들은 없었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중략)



 

'강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안보정세  (0) 2007.11.29
한미동맹의 발전과 승화발전  (0) 2007.11.29
국립호국원 소개  (0) 2007.02.27
4.3평화공원 조성사업 계획  (0) 2007.02.27
충혼묘지 조례  (0) 2007.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