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본 안보의 중요성
∘ 반만년 우리의 역사에서 외침만 932회로 평균 5년에 한번 꼴로 외침을 당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안보를 소홀히 해서 아예 안보를 무시해서 민족적 수난과 화를 얼마나 당했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의 외침과 항쟁사를 분석해 보면,
첫째 : 우리 역사상 최대의 국란이라는 임진왜란이다.
∘ 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 25년, 일본군의 침략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 전 지각있는 우리 선조들이 수차에 걸쳐 왜란에 대비하도록 경고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조정은 듣지 않고 오로지 동인, 서인의 당파싸움에만 매달렸던 것�. 신숙주는 “일본을 대비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율곡은 “왜란에 대비하여 10만을 양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충청도 옥천의 조헌(후에 의병장이 됨)은 도끼를 들고 서울로 올라가 경복국앞에 엎드려 몇날 몇일을 읍소하는데 “왜란 대비하소서, 아니 들으시려거든 이 도끼로 신의 목을 찍어 주소서” 그러나 조선 조정은 미친놈으로 취급하여 길주로 귀양을 보내 버린다. 일본 수신사로 갔던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눈이 빛나고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고 경고하지만, 당시 서인 정권은 이를 묵살해 버린다.
∘ 결국 일본군은 임진년 4월 부산에 상륙,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오늘날 비행기, 전차, 자동차 등이 발달한 상황에서 완전 기습을 장담하고 있는 북한도 한반도 석권 10일 작전, 20일 작전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아무런 저항없이 그냥 걸어갔다는 얘기가 된다.
∘ 이후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7년간 계속되는데 우리측 항전의 특징은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면 관군은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의병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것이다.
∘ 그러나 오합지졸의 의병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일부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장열한 전사를 하고 만다. 특히 정유재란시 남원성이 함락되었을 당시, 의병전사자수가 3,726여명이었는데, 일본군은 이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담아 전승기념물로 본국으로 가져가 전승기념묘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교토의 耳총”이다. (실제로는 코인데 귀로 바꾼 것은 잔학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결과 : 7년간의 전쟁에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국토가 황폐화하여 경작지가 1/3로 줄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고, 약탈당하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인들의 수난이다. 수많은 여인들이 왜병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그 씨를 잉태한 후 출산을 하게 되자, 이것이 사회문제화 됨. 할 수 없이 조정은 이들을 남산 남쪽에 모여살게 했는데 , 지명이 異胎圓(다른 피를 가진 아이를 밴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효종때 지명이 주는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梨泰院(배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둘째 : 치욕의 병자호란이다.(1636년, 인조9년)
∘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대북, 소북의 당파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가운데 임진왜란후 정확히 37년만에 후금 태종(만주족 누루하치)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수한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 그러나 9년후 후금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이제는 군신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자 청태종은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한다. 전쟁의 경과는 2주만에 서울이 점령 당하는데, 청군은 당시 현대적 의미의 기동전, 즉 우회전을 편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피난, 45일간 항전하다 ‘삼전도’에서 항복한다.
∘ 결과 :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매년 받치게 하고 3학사 등 인질로 잡혀간다.
- 치욕적인 항복의 예 : 1637년 1월30일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 피난처인 남한산성을 나섰다.(병자호란후 45일)
그날의 광경을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기록
“주상 전하께서 남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중략) 주상 전하께서 삼공육경을 거느리시고 백보 가량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셨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예를 3번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청태종은 단을 높이 쌓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인조는 청나라 복장을 입고 군신의 예를 갖는다. 당시 인조는 얼어붙은 땅에 머리를 부딪쳤고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오랑캐들을 받들겠다는 항복문서를 바쳤다.
- 삼전도(송파) 청태종 공덕비에는 “평화를 파괴한 것이 조선측이며, 남한산성에서 봄철의 얼음을 밟듯 떨고 있던 인조를 청태종이 죽이지 않고, 덕을 펴서 그 덕으로 꿩처럼 흩어졌던 백성이 모여들어,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찬뿌리에 다시 봄이 오는 것 같다”는 것이 비문내용이다. 이 비문을 썼던 사람은 당대의 명필 오준(한성판윤)이었고, 이는 이 비문을 쓰고 죄책감에 손가락을 자르고 절필하였다고 한다.
※ 삼전도비 : 서울 송파구에 위치, 높이 5.7m, 너비 1.4m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 항복이후 2년이 지나 청나라가 조선조정에 “대청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도록 지시”
- 이 비석은 청일전쟁후 주민들이 해체하여 강물에 버렸으나, 일제가 우리 역사를 비하하기 위해 물속에서 건져 재건하였다. 다시 8.15 해방이 되자 주민들이 이번에는 땅속에 매몰하였으나, 1963년 홍수때 발견되어 당시 논란이 있었으나 “실패한 역사도 우리에 역사”라는 견지에서 복원, 현재 석촌동 백제고분 근처에 있다.
- 여기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인들의 수난이다.
청나라는 항복조건으로 소현세자, 봉림대군, 대신들과 그들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조선 처녀 수만명이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것도 이때 일이다.
청나라에 끌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갖은 능욕을 당하면서 노예생활을 하는 형언할 수 없는 수난을 당함. 조선에 있는 가족들이 이들을 찾아 나서나, 사대부집 여인 등 신분이 높을수록 능욕당하고도 수절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자기 가족들에게 나타나지 못하고 숨어버림.
천신만고 끝에 가족을 찾게 되면 贖價(죄값으로 치른 돈)을 지불했는데 참으로 어이없는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노릇이다. 양가집의 귀한 여인들을 잡아다가 실컷 능욕하고, 노예로 부려먹다가 다시 죄값으로 받고서야 돌려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인 것이다. 속가를 치르고 나이가 들어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온 2만5천여명의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는데 오늘날 화냥년의 어원이 된 것이다.
∘ 교훈 : 당시 여진족 인구 30만, 조선은 150만이었고, 일본군의 조총도 보유하고 있어, 조정이 어느정도만 대비했어도 이토록 처절한 오욕의 역사는 피할 수 있었을텐데,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고, 패하고 또 패해도 하등의 대비책을 강구하기 않은 채, 오직 당파싸움에만 매달려 결국 오랑케에 의한 남한산성의 치욕,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당하고도 안보를 소홀히 할 것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이후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 왔는가?
∘ 병자호란이후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또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 다행히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우리는 8.15 해방을 맞지만, 또다시 “우익이다, 좌익이다, 찬탁이다, 반탁이다” 외세에 의존해서 분열하다가 급기야는 민족끼리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치르게 되고 분단을 맞게된다.
∘ 이제 분단 반세기만에 분단의 벽을 허물고자 하나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할 남한은 국민감정이 동서로 갈리어 있고, 보수와 진보간에 갈등 또한 심각하다. 과연 우리 민족은 단합할 수 없는 민족인가?
∘ 결국 힘있는 민족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만, 힘없는 민족 즉 안보를 소홀히 하는 민족은 역사의 재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진정으로 깨달아야 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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