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군

1.4후퇴와 제주로 온 고아

똥맹돌이 2015. 6. 12. 19:46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이 계속되면서 통일이 다가오는 듯 했지만 10월 25일 중공군 1,2차 공세를 시작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를 거듭하게 된다. 1950년 12월 24일 서울 시민들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당시 서울시립 아동양육원에 있던 고아 1,059명의 피난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고아들은 1950년 9월 서울을 탈환하였을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 곳곳에 부모를 잃고 거리를 해매고 있다가 미 군목 브레이즈델 대령에 의해 모이게 된 아이들이었다. 브레이즈델 대령은 한국정부와 서울시에 부탁해 고아들을 수용할 건물을 마련하고 어린 고아들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퇴각을 거듭하면서 1950년 12월 24일 서울 소개령이 내려지자 고아들의 상황이 급박해졌다. 한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 아동양육원에 수용된 아이들을 이동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아이들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브레이즈델 대령과 헤스대령은 고아들을 제주로 이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헤스대령은 LST를 수소문하면서 크레그웰 중위를 제주도로 보내 제주농업학교를 인수토록 하였고, 브레이즈델 대령은 37대의 트럭을 구해 아이들을 인천항까지 이동하였다. 소위 ‘장난감 자동차작전(Operation Kiddy Car)'이었다. 그러나 인천항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착했지만 보내주기론 한 LST는 흥남 저수지 쪽에서 퇴각하던 미군 해병대를 구출하기 위해 동해로 보내져 인천으로 오지 않았다. 날씨는 추운데다 옷도 얇았던 어린이들 중 허약한 7명이 인천부둣가에서 죽거나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절망 속에 브레이즈델 대령과 헤쓰대령은 지친 아이들을 이끌고 김포공항까지 걸어서 도착했다. 그리고 미 공군 헤스대령의 교섭으로 1950년 12월 27일 이들 907명의 고아들은 공수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85명의 전쟁고아 제1진을 시작으로 고아들은 C-54수송기 7대로 16회에 걸쳐 제주도로 수송되었다. 1진이 도착하던 날 비행장에는 하얀 한복차림의 김충희지사를 비롯 전인홍 총무국장, 이종극 경찰국장 등 많은 관민이 나와 의지할데 없는 어린 생명들을 따뜻이 맞이했다. 이에 앞서 김충희지사는 제주농업중학교 최광식 교장을 찾아 고아수용문제를 논의하여 운동장에 임시 수용소를 마련키로 하고 3동의 콘세트 건물을 급조하는 등 준지작업을 하였다. 제주도로 온 고아들은 제주농업학교의 천막과 교실에 연령별로 수용되었고 이들을 위한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 등을 임시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진흙과 돌 바닥 위에 세워진 단층 건물로 유리창 대부분이 오랜 풍파로 깨져서, 양철 조각이나 마분지에 가려져 있어 흉한 모습이었다. 대통령 부인의 추천으로 1951년 4월 황온순은 이 고아들을 보육하기 위하여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한국보육원을 설립하였는데 도민들은 ‘UN고아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공식적 기관의 도움이 없이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힘들었다. 고아들 상당수가 굶주림과 식수난으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백일해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한편 한국보육원 고문이었던 최승만은 사회부장관 허정의 추천으로 제주도에 온 피난민 구호사업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사회부제주도 분실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회부 제주도분실은 직원 6명과 함께 제주남국민학교에 사무실을 두어 피난민 구호사업 일체를 관장하였다. 이때 구호양곡 및 부식비 등은 도에서 보관하되 지출은 반드시 사회부 분실장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있었다. 그런 까닭에 김충희지사와 최승만 분실장 사이는 불편한 관계였다. 최승만 분실장은 이러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도지사, CAC책임자, 민간인 대표 이호빈 목사 등으로 피난민구호위원회를 조직하여 구호업무를 협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휼병감실에서는 실제 병력보다 많은 유령숫자를 만들어 구호양곡과 부식비를 받아가서 물의를 빚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어느 날 지사실에 도지사와 최 분실장, 도 총무국장, 사회과장과 군인 3명이 참석하여 구호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였다. 총무국장이 군인 숫자를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하자 군인대표(중령)가 “군인에 대한 구호문제는 자신들의 소관이다. 우리 군인들은 단순합니다.”라면서 권총주머니에 손을 대었다.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최 실장은 “그러면 휼병감실에서 구호사무를 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이오.”라고 묻자, “군인문제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강경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구호대상자의 성명과 계급만을 분명히 적어주면 그것에 대하여 구호양곡과 부식을 주면 되지 않겠냐고”하여 설득하자 더 이상 말을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호물자에 대한 배급은 주민들 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군대까지 노골적으로 개입하였다. 한편, 1951년에는 제주북초등학교 내에 신체장애자 복지시설로 맹아학교가, 삼성혈에는 제주보육원이 설립되었고, 1952년에는 제주모자원, 1953년에 송죽보육원이 개설하게 된다.

 

6·25 전쟁 항공전의 영웅, 전쟁고아들의 아버지였던 딘 헤스(Dean E·Hess) 대령이 3월 3일(화) 오전 1시(美 오하이오 주 현지시각)에 별세했다. 향년 9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