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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똥맹돌이 2015. 1. 8. 16:33

제83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 8일(목)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제83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목)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은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일반시민, 학생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사보고,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에 이어 서울지방보훈청장 · 광복회장의 기념사, 헌화 순으로 진행된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봉창.

호적에는 1901년 8월 10일 서울시 용산구 원정2가 3통3반에서 부친 이진구와 어머니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심문조서에는 1900년생으로 되어있다. 본관은 진주이다.

어린시절은 상당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부친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초등교육기관인 사립 문창학교를 겨우 입학,졸업할 수 있었다. 기족 생계를 위하여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제과점이나 약방 등 험난한 ‘고용살이’와 용산역 역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25년 11월 이봉창은 조카 이인임을 데리고 오사카로 갔다. 보다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서. 그의 바람과 달리 현지 상황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직업소개소에 신원증명서 등을 제출하였으나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일용잡부로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유치장 신세를 졌다. 경찰은 폭행과 폭언 등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내보다 민족적인 차별이 훨씬 심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기에 이르렀다. ‘신일본인’으로서 살아보려는 원대한 꿈은 무참하게 좌절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6년간 일본에서 생활을 청산한 후 1930년 12월 상하이로 간다. 그는 임시정부 사무소를 찾아와 우리말과 일본어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청년들은 그를 일제밀정으로 의심하여 쫒아내려고 실강이가 벌어졌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백범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직감하였다.

백범과 이봉창 해우는 “서로 간 심지(心地)가 상조(相照)하여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하였다. 구름과 비가 만나듯이, 이들 만남은 적의 심장부에서 ‘동경의거’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봉창 또한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公心)”을 가진 인물로 탄복하였다. 상호간 절대적인 신뢰감은 동경의거를 결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1932년 1월 8일 11시 44~45분 경에 마차 행렬을 향하여 던진 폭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불행하게도 소리만 요란하였을 뿐이다. 직감적으로 ‘실패했다’라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일왕 저격에는 실패했으나 국내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중국 신문은 연일 대서특필하는 등 일제의 침략적인 만행을 규탄하였다. 국회 한인사회 언론도 외신을 통하여 이를 신속하게 보도하였다. 침체 상태에 빠졌던 임시정부도 이를 계기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는 윤봉길의거를 위한 전주곡이었다.

그는 혈육 한 점 없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독립기념관 통권 제290호 2012년 4월에서 발췌)